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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22. 2017

부산 일기

사람이 진심으로 엮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를 지니지 않은 다자키 츠크루와 그의 순례의 해'를 꺼낸지 어언 수 달이 지났다. 이 책이 일본에 나온 게 2014년 봄 무렵이고 내가 책을 산지도 그 즈음이니 4년 넘게 책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본래 천천히 읽는 타입이기도 하지만 근래에 해야 할 일이 더러 있었다. 일본엘 두 차례 다녀왔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부산에선 무려 통역이란 일에 처음으로 도전했다(도전이라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그래서 이번 부산에선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고 싶단 생각에 다시 책을 챙겼다. 다자키 츠크루가 헬싱키 여행을 하는 대목. 김해 공항까지 가는 길에 1시간 여의 독서를 했다. 츠크루가 이제는 에리가 된 쿠로와 기나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졌고 쌓였던 오해가 스르르 풀리는 이야기가 흘러갔다. 10여 년 전 친구 무리로부터 버림 받은 사건으로 한 차례 텅 빈 자신과 마주했던 츠크루는 이제 색채가 없음, 그 자체를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자신과 마주하려 한다. 비행기가 착륙의 준비를 시작했고, 나는 책장을 덮었다.  


돌아가는 길의 독서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부산에서 본 영화의 느낌, 겪었던 일들의 플래시백, 보고 느꼈던 감정들의 잔상들이 독서를 더디게 했다. 결국 책장을 덮고 이어폰을 꽂았다. 오래 전 아이폰에 넣어놨을 스피츠의 곡들을 셔플로 돌렸는데 그만 가슴이, 마음이 미어져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설명서에 써있지 않는 방식만으로 동경하는 마음에 다가갔어. 전하고 싶은 말들이 넘쳐날 정도로 많았어. 그런데 사랑스러워 잊고 말았지. 창피한 꿈 꾸고 기세로 거짓말도 했었어. 그래도 지금 당신과 만나서 다행이야.' '아름다운 세상에 미움받는다고 해도 그걸로 드디어 당신과 만나서 다행이야.' 어느 순간, 어느 대목이라 할 것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런 감정, 생각이 없는 한참을 보냈다. 노래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 다시 한 번을 들어보지 않았으면 그냥 그렇게 지나갔을 순간이다. 창피한 꿈을 꾸고 기세로 거짓말도 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미움받는다고 해도, 그래도 다행이다라는 가사. 내 삶이, 지나간 시간이 노래되는 것 같았다. 노래의 제목은 에니시(えにし), 인연이다.



감정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신고를 하고 짐을 찾은 뒤 김해 공항에서부터 계속 마음에 걸려있던 새로 산 부산 영화제 티셔츠와 이세이 미야케 팬츠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삼송 빵집에서 옥수수 빵을 산 뒤 밖으로 나가 버스를 기다리는 줄에 서 노래를 다시 들었는데 의외로 감정이 휘발되고 없었다. 그저 편안함, 평온함, 차분함 같은 게 느껴질 뿐이다. 버스는 20분 넘게 기다린 뒤에야 도착했다. 15kg에 달하는 수트 케이스를 낑낑대며 끌고 들어가 자리에 앉아 노래를 들었다. 이번에는 쿠루리. 역시 셔플로 들었는데 한 노래가 영화제 기간 중의 어느 한 장면을 상기시켰다. '언제까지나 그대로 울다가 웃다가 할 수 있도록, 금방이라도 흐려질 듯한 하늘을 조금 맑게 할 수 있도록, 신이시여, 아주 조금만 그림에 그린 것 같은 행복을, 나누워 받을 그 날까지 어떻게든 눈물을 모아주세요.' '지루한 매일도 당연하게 스쳐 지나가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틈 사이에 핀 꽃, 내년에도 만나요.' 노래의 제목은 기적(奇跡).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예전에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안경', 아니면 스폰지 하우스에서 하는 특별전 같은 걸로 내한하셨을 때인데 무언가 찜찜함 같은 게 있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는데, 어딘가 찜찜한 무언가. 그것이 이번 부산 영화제에서 그녀의 인터뷰를 통역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시 생각났다. 그래서 중요했다. 긴장했다. 걱정도 했다. 게다가 일정의 마지막 날인 20일은 '오기가미 데이'라 할 정도로 모두 네 개의 일정이 다 그녀와의 스케쥴이었다. 두 개의 언론 인터뷰, 하나의 동영상 인터뷰, 그리고 하나의 GV.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일을 하면 할 수록 적응이 되어 조금은 여유를 갖고 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는 괜찮았다. 거의 떨지도 않았고 거의 버벅대지도 않았다. 거의 놓치지도 않얐다. 그리고 마지막 GV를 마무리하면서 오기가미 감독은 내게 '수고 많았어요. 고맙습니다'란 말은 건넸다. 형식적인 인사치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엔 무언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이 장면이 다시 떠올라 나는 울고 말았다. 히터가 틀어져 찜통같은 버스에서 15kg의 수트 케이스를 발밑에 두고 말이다.


츠쿠루는 아직도 헬싱키에 있지만 나는 인천, 나의 집이다. 곰돌이는 열흘만의 재회를 발랄하게 반겨주웠고 엄마와 누나들은 삼송 빵집의 옥수수 빵을 맛있게 먹어주웠다. 인터뷰 답변을 독촉하는 메일을 두 통 보냈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나의 퍼블리 두 번째 프로젝트는 일면 짐이 되고 말았지만 부산에서의 기억, 두 번의 눈물, 그리고 그 감정을 간직하며 쓸 생각이다. 그리고 결코, 절대 찬밥 신세로 끝나지 않게 할 각오를 다졌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신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를 따라해 말해보면 사람이 진심으로 무언가를 할 때 성취되는 것이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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