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NORESQU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Mar 30. 2017

새해의 기억

사람은 어리석게도 이렇게 산다

누나들이 모였다. 곰돌이도 있다. 근데 아빠만 없다. 어제 저녁 소파에 누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이 모여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즐겁게 윷놀이를 하고 원카드 게임도 노는데 아빠만 없었다. 눈물이 났다.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보내드린 게, 임종을 지켜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내 맘을 울컥이게 했다. 성당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토요일날 아빠 이름으로 미사를 넣어 놓으셨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눈이 오기 시작한 날이었다.


진눈깨비는 정말로 짓궃게 내렸다. 날씨는 분명히 영하일 것 같았다. 츄리닝 위에 츄리닝을 입고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두꺼운 양말을 신었다. 신발은 털 달린 부츠로, 머리에는 털 달린 모자를, 얼굴에는 두터운 마스크를 썼다. 최대한의 무장을 하고 나섰다. 오자마자 녹아버린 눈은 질펀한 도로를 만들어 놨다. 칙~, 칙~거품을 내뿜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났다. 성당은 작고 예뻤다. 들어가면서부터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엄마를 따라했다. 성모 마리아 앞에서 인사, 눈 앞에 십자가가 보였다.


미사 5분 전. 누나가 고해성사를 보러 줄을 섰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나도 따라가 줄을 섰다.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르다 생각했는지 누나가 나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앞에는 한 아주머니가 대기하고 계셨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앞의 신자가 나오고 내 차례가 되었다. 조금 긴장이 되었다.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되내어 보았다. 다행히도 성사 실에는 안내문 같은 게 붙어 있었다. "고해성사 본지 OO되었습니다." 나는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됐습니다"라고 말하며 죄를 고했다.


어릴 적 고해성사를 하면 '주의 기도문 100번', '성모송 50번'과 같은 숙제를 내주셨다. 숙제를 다 해야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도 그렇다면 나는 수 만번의 기도를 해야할 거라 속으로 생각했다. 마음에 작게 진동이 일었다. 내 죄를 꺼내어 내기가 무섭고 두려웠다. 결국 나는 첫 문장에서 울어버렸다.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생각도 잘 안나고, 그래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많이 아파 엄마를 힘들게 한 점, 동성애자라 미안한 것, 빚을 많이 져 또 엄마를 힘들게 한 점. 더 많은 죄가 있을텐데 시간이 모자랐다. 아니 내 감정에 여력이 없었다. 아빠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


새해는 새로운 시작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 모른다. 그저 모든 건 우리의 착각일지 모른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반성과 다짐을 해도 새 날이 화창하고 다를 거란 보장은 없다. 과거는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해 우리는 새해에 마음을 설레인다. 지키지 못할 걸 알면서 또 계획을 세우고 새로 다짐도 한다. 다이어리에 한 해의 목표라며 써놓기도 한다. 올해로 서른 여섯, 만으로 빼도 박도 못하는 서른 다섯. 지금까지 서른 다섯번의 새해를 맞았다. 그럼에도 올해도 여전히 설레인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리석게도 이렇게 산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옥의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