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리석게도 이렇게 산다
누나들이 모였다. 곰돌이도 있다. 근데 아빠만 없다. 어제 저녁 소파에 누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이 모여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즐겁게 윷놀이를 하고 원카드 게임도 노는데 아빠만 없었다. 눈물이 났다.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보내드린 게, 임종을 지켜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내 맘을 울컥이게 했다. 성당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토요일날 아빠 이름으로 미사를 넣어 놓으셨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눈이 오기 시작한 날이었다.
진눈깨비는 정말로 짓궃게 내렸다. 날씨는 분명히 영하일 것 같았다. 츄리닝 위에 츄리닝을 입고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두꺼운 양말을 신었다. 신발은 털 달린 부츠로, 머리에는 털 달린 모자를, 얼굴에는 두터운 마스크를 썼다. 최대한의 무장을 하고 나섰다. 오자마자 녹아버린 눈은 질펀한 도로를 만들어 놨다. 칙~, 칙~거품을 내뿜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났다. 성당은 작고 예뻤다. 들어가면서부터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엄마를 따라했다. 성모 마리아 앞에서 인사, 눈 앞에 십자가가 보였다.
미사 5분 전. 누나가 고해성사를 보러 줄을 섰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나도 따라가 줄을 섰다.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르다 생각했는지 누나가 나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앞에는 한 아주머니가 대기하고 계셨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앞의 신자가 나오고 내 차례가 되었다. 조금 긴장이 되었다.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되내어 보았다. 다행히도 성사 실에는 안내문 같은 게 붙어 있었다. "고해성사 본지 OO되었습니다." 나는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됐습니다"라고 말하며 죄를 고했다.
어릴 적 고해성사를 하면 '주의 기도문 100번', '성모송 50번'과 같은 숙제를 내주셨다. 숙제를 다 해야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도 그렇다면 나는 수 만번의 기도를 해야할 거라 속으로 생각했다. 마음에 작게 진동이 일었다. 내 죄를 꺼내어 내기가 무섭고 두려웠다. 결국 나는 첫 문장에서 울어버렸다.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생각도 잘 안나고, 그래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많이 아파 엄마를 힘들게 한 점, 동성애자라 미안한 것, 빚을 많이 져 또 엄마를 힘들게 한 점. 더 많은 죄가 있을텐데 시간이 모자랐다. 아니 내 감정에 여력이 없었다. 아빠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
새해는 새로운 시작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 모른다. 그저 모든 건 우리의 착각일지 모른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반성과 다짐을 해도 새 날이 화창하고 다를 거란 보장은 없다. 과거는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해 우리는 새해에 마음을 설레인다. 지키지 못할 걸 알면서 또 계획을 세우고 새로 다짐도 한다. 다이어리에 한 해의 목표라며 써놓기도 한다. 올해로 서른 여섯, 만으로 빼도 박도 못하는 서른 다섯. 지금까지 서른 다섯번의 새해를 맞았다. 그럼에도 올해도 여전히 설레인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리석게도 이렇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