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갛고 파란 세계의 하늘이 일러준 생각. 파랑을 기다리며 세상을 보았다.
영국 런던을 여행할 때였다. 횡단보도가 나오면 무조건 멈춰 섰다. 선진국에 가진 막연한 환상이 엄숙한 공중도덕으로 나왔다. 옆의 호청년이 갈지자로 4차선 도로를 횡단해도 일단은 인내심을 꺼냈다. 보행자를 위한 바닥의 레프트 표시에는 친절하단 생각마저 했다. 여행하는 길에 바쁠 것은 없었다. 그저 파랑을 기다렸다. 하지만 막연한 공중도덕은 애매모호한 빨강과 파랑의 타이밍 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어폰 속 노래 한 곡이 통째로 끝나도 파랑은 오지 않았다. 어쩔 때는 발을 멈추기가 무섭게 파랑이 되기도 했다. 꼬부랑 할머니가 손을 들어 누르는 신호등 버튼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하루의 반나절을 빨강과 함께 했을지 모른다.
런던의 신호등은 대개 버튼식이다. 차보다 보행자를 우선시하는 영국의 교통체계는 사람에게 먼저 길을 갈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보행자는 파랑을 기다릴 필요 없이 버튼을 누르고 건너면 된다. 영국 교통법 20조에는 ‘얼룩말 신호(Zebra Crossing)'라는 것도 명시하고 있다. 흰색과 검은색 줄이 기둥을 둘둘 말고 있는 이 신호등엔 빨강불도 파랑불도 없다. 원형의 긴 막대를 핸드볼 공 크기의 주황색 원형이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도심 한 가운데서도, 주택가 구석 곳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이 신호등은 무조건 파랑의 의미다. 얼룩말 신호등 앞에서 차는 일단 정지해야 한다. 영국의 보행자들이 다소 거칠게 도로를 종횡하는 건 보행자를 차보다 위에 두는 영국의 교통법 탓인지도 모르겠다. 영국에선 차보다 사람 조심이다.
같은 버튼식이지만 뉴질랜드의 신호등은 보행자 우선 주위 때문이 아니다. 차량의 수보다 보행자의 수가 현격히 적은 이 나라에서 파랑의 시간은 다소 소모적이다. 사람도 없는데 차들은 파랑이란 이유로 정차해야 한다. 그래서 뉴질랜드 신호등에 버튼이 붙었다. 원활한 빨강을 위한 역할이다. 영국의 옆 나라 프랑스에 가면 신호등은 키를 낮춘다. 1미터 남짓 되는 높이에 매달린 빨강과 파랑은 운전자의 시야를 위한 조치다. 그리고 동시에 보행자에 대한 환기 기능을 한다. 하늘 높이 걸린 신호등이 운전자의 시야를 원거리로 확장해 차 사이 거리 확보에 신경을 쓴다면, 앉은뱅이 신호등은 보행자와의 거리, 보행자와의 시선 교류를 통해 사람과 차 사이의 안전을 중시한다. 프랑스의 교통 체계는 신호의 본 기능인 커뮤니케이션에 충실하다.
중국에서 길을 건널 때는 눈이 어지럽다. 일본에서 길을 건널 때는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2004년 5월 교통 관련법을 강력 개정한 중국이지만 아직도 중국의 대부분의 거리에선 신호보다 빈틈이나 눈치가 빨리 먹힌다. 중국의 교통 상황을 ‘법과 무법의 질서’라 표기한 위키피디아의 표현처럼 과속 근대화 속 정돈된 중국의 도로들은 신호의 합리체계를 시시각각 임시방편으로 대체한다. 이곳에서 공중도덕은 ‘소귀에 경 읽기’다. 일본에서는 다소 음침한 멜로디와 함께 길을 건넌다. 자연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일본의 애니미즘은 길을 건너는 이의 복을 빌며 신호등에 스피커를 달았다. ‘지나가요, 이곳은 누구의 길입니까, 천사님의 길입니다’란 가사를 가진 동요 ‘토오랸세(通りゃんせ)’의 멜로디다. 어쩌면 일본에서 중요한 건 파랑의 약속보다 수만 년째 길 위를 지켜온 신의 가호인지 모른다.
신호는 약속이다. 누가 멈출 것인지에 대한 약속이고 누가 먼저 길을 갈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도시의 성격을 드러낸다. 꽤나 성급한 중국, 자유분방한 영국, 합리적인 프랑스와 침착한 일본 등. 때로는 역사의 산물이 되기도 하다. 독일의 신호 마스코트이자 인기 캐릭터인 암펠만(Ampelmann)은 구 동독과 서독의 분열, 통합의 시간을 대변한다. 교통심리학자 카알 페글라우(Karl Peglau)가 1961년 만들어 구동독의 신호등 표시로 쓰인 암펠만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균열되어 있던 게를린 민족의 유대를 다지는 좋은 촉매가 되었다. 상대의 약속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약속을 맺을 때 도시는 한 번 성장한다. 빨갛고 파란 세계의 하늘이 일러준 생각. 파랑을 기다리며 세상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