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저 물 흐르듯 흐르고 반응한다. 물의 특징은 스며든다는 것이다 .
수오 마사유키의 법정 심리극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의 마지막. 나는 말을 잃었다. 법의 체계와 사회란 이름의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띄우는 이 복잡한 영화가 막을 내리는 건 한 배우의 얼굴이다. 무표정의 얼굴, 그 단 하나로 영화는 막을 닫는다. 앞모습과 뒷모습, 측면의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정면을 비추는 카메라는 한 사람의 얼굴에 주목한다.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걸 말하고 있는 듯한 얼굴은 우리의 감정을 확장시킨다. 외꺼풀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코와 입, 그리고 부드러운 얼굴선. 그러니까 모가 나지 않은 얼굴. 주장을 한다기보다 이야기를 들으려는 듯한 모양새, 동시에 타인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생김새. 바로, 카세 료의 얼굴이다. 카세 료는 치한으로 오해받아 반년 넘게 구류 생활을 하는 억울한 남성을 연기한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메아리쳐 돌아오기만 할 뿐, 달라지지 않는, 달라지려 하지 않는 일본의 법 체계와 사회의 답답함, 폐쇄성을 연기로 담아낸다. 인간이 사회의 답답함, 폐소감을 표현한다니 꽤나 고난위도일 것이다. 하지만 카세 료는 이 꽤나 고난위도일 연기를, 사회의 폐소감을, 답답함을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같지만 모든 걸 말하고 있는 듯한 연기로 표현해 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영화의 결말이 된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일본에서 찾을 수 있는 해답이, 일본의 법체제에서 찾아낼 수 있는 비상구가 결국 카세 료의 얼굴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역설적이게도 그렇다. 그만큼 카세의 얼굴은 일본의 시스템이 치명적인 헛점 투성이임을, 모순 덩어리임을 반증하는 얼굴로 발현한다. 그냥 얼굴이 아니다. 영화적 얼굴이다. 동시에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기가미 나오코 못지 않게 카세 료는 무색에, 여백이 많고, 느긋한 이미지가 강한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출연한 영화 중 많이 알려진 작품이 대다수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안경', '수영장', '마더 워터', '허니와 클로버' 등. 그러니까 그는 브랜드 무인양품을 닮은 구석이 있다. 동시에 카세 료는 TV 오락 프로그램에 거의 출연하지 않는다. CM 또한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에 관한 이미지가 온전히 작품에서 비롯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 무색에, 여백이 많고, 느긋한 이미지가 실은 무어라 말할 수 없고, 어떠한 카테고리로도, 프레임으로도 정리될 수 없는 복잡 미묘하고 심오한 고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카세는 만화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화사하고 뽀샤시한 영화 '허니와 클로버'에서도 스토커라는 뒤틀린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청년을 연기했다. 게다가 쿠마키리 카즈요시의 걸작 '카이탄시의 서경'에서는 마초에 가부장적이며, 콧수염에 금시계를 걸친 남자를 연기한다. 그는 처음으로(내가 본 영화 중에서는, 아마도 유일하게) 보쿠(僕)가 아닌 오레(俺)로 자신을 지칭하며, 아이를 손찌검했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폭행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쁜 남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세는 이 전형적인 마초 남성의 캐릭터를 쓸쓸한 뒷모습을 품은 남자로 그려내고야 만다. 회사 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한 뒤 밖에 나와 한숨을 쉬는 장면은 자신의 못난 면과 직면한 사람의 좌절감, 허무함, 실망감, 그리고 무력함을 그 자체로 드러낸 대목이다. 카세의 축 늘어진 어깨와 회의에 젖은 그의 얼굴이 이를 말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다.
'반응하는 배우', 카세 료 앞에서 말은 힘을 잃는다. 그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기란 꽤나 힘든 일이다. 그저 무지에 가깝다, 꾸밈이 없다, 맑다, 투명하다 정도로 애를 써볼 뿐이다. 그는 메소드 배우도 아니고, 역할을 자신에게 있는 힘껏 데려와 자기화 시키는 개성이 뚜렷한 배우도 아니다. 매 영화가 다르지만 같고, 매 영화가 같지만 다르다. 그게 카세 료다. 그러니까 그는 물과 같다. 그에 관해 말해 볼 수 있는 건 아마 이 정도일 것이다. 그는 항상 존재하지만 티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빠졌을 때 그 자리는 선명해진다. 그리고 일본의 모 TV 프로그램은 카세 료에 대한 작은 특집을 전하며 '카세 료는 반응하는 배우'라 정의했다. 액팅이 아니라 리액팅, 행동이 아니라 반응. 실제로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에서 카세 료가 변호사에게 '그런 걸 변호사가 하는 거잖아!'라고 소리치는 대목은 그의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카세는 '그렇게 멸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니까...'라며 웃으며 답했다. 별 거 아니었다는 듯이. 그러니까 그는 흐른다. 반응한다. 다시 말해 카세 료는 물과 같다. 카세 료는 2000년 이시이 소고 감독의 영화로 데뷔해 지금까지 모두 8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7년 간 80편. 장편만 세서 그렇다. 그런데 이 모든 영화가, 80편의 이 모든 작품이 오디션을 통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디션을 통해 역할을 따고 연기하는 것이 마음이 편안하다. 보여주고, 서로 안 뒤에 작업하는 쪽에 마음이 기운다'고 말했다. 그의 성미가 짐작된다. 더불어 일본의 어느 한 인터뷰에서 그는 '쓸쓸하고 외로운 영화가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품에 안기고 싶어진다. 표현하지 못해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두드러지지 못하는 게 아니다.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저 물 흐르듯 흐르고 반응한다. 물의 특징은 스며든다는 것이다 .
'자유의 언덕'이 궁금했다. 홍상수와 카세 료의 조합이 궁금했다.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들은 (김민희가 등장하기 전) 홍상수 세계를 설명하는 기표로 작용했다. 보이지 않고, 형태도 규정할 수 없으며, 말로도 충분치 못한 본질의 세계를 설명하려 애쓰는 기표로써의 배우들 말이다. 그래서 카세 료의 '자유의 언덕'이 궁금했다. 그가 홍상수 세계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고, 대본 없는 영화에, 배우를 자신의 세계 안에 반응케 하는 홍상수의 방식에 어떻게 적응할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궁금했다. 2014년 영화임에도, 3년이나 지난 영화임에도 궁금했다(왜 이 영화를 아직까지 보지 않았는지 미스테리다). 영화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쩌면 함께 살뻔 했던 여자 권을 찾아 한국에 온 모리의 이야기다. 카세 료가 모리로 출연한다. 영화는 대부분 모리의 나레이션으로, 아주 가끔 권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흔하지 않게 카세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심지어 그는 정말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영어 연기를 한다. 무엇보다 모리는, 카세 료는 물음표다. 마주하는 사람마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관광인지 비지니스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모리는 그런 게 무엇이 중요하냐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영화의 표정, 홍상수의 표정이다. 그러니까 그는 정의, 단어, 명사로 단정되는 세계를 부정하는, 그 세계에 의문을 던지는 남자, 형용사이거나 부사다. 그의 이름이 키(木, 나무)가 아니라 모리(森, 숲)란 점에 주목할 만하다. 동시에 그는 ing다. 권을 찾아 나아가고 있어서 ing고, 여행을 하고 있어 ing.다. 영화에서 모리는 권을 만난다. 영화에서 모리는 권을 만나지 못한다. 영화는 역시나, 이번에도 본질 앞에서 돌아선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모리, 카세 료다. 모리에게서 경수(<생활의 발견>)가, 동수(<극장전>)가 어렴풋이 보였다. 자유의 언덕을 향하지만 끝나지 않는 ing. 여기서 카세 료의 모습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형용사, 카세 료는 바로 그런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