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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09. 2017

아름다운 실패, 자유의 언덕

모리의 여정은 실패했으나 시도는 실패하지 않았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홍상수 영화에서 제목은 문과 같다. 제목을 본 순간 우리는 그의 영화 세계에 진입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혼자'가 말미에 놓였을 때, '극장전'에서 '전'이 전(前)과 전(傳) 사이에서 부유할 때, 그리고 '그 후'의 영화 제목이 'The Day After'일 때 우리는 홍상수 월드의 프레임, 윤곽, 골자와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만의 언어로 구성된, 그렇게 실천된 세계와 부대낌 없이 만날 수 있다. 동시에 현실에서 본질을 모색하는 그의 영화를 마주하는 최소한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꽤나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수월하게 다가오는 건 아니다. 현실에서 본질을 마주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며, 영화란 프레임이 더해졌다고 해서 그 어려움이 덜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유의 언덕' 역시 마찬가지다. 다소 진부하고, 클리셰 그 자체인 듯 들리는 이 문구가 홍상수 영화의 열 여섯 번째 영화 제목이다. 쉬울 것 같지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번에도 제목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북촌에 있는 카페 '지유가오카 8번가(自由が丘8丁目)'의 '자유의 언덕'과 본질, 순수한 자유로서의 '자유의 언덕'. 영화는 언덕을 오른다. 물리적인 오름과 동시에 실존론적인 오름. 이렇게 본질은 현실 곁에 한층 가깝게 다가선다.  


영화는 모리의 이야기다. 모리는 일본의 배우 카세 료가 맡았다. 나무(木)가 아니고 숲(森). 모리는 권이란 여성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준비라고 하면 출발 전 그녀에게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보낸 게 전부다.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한국에 온다. 권의 집 근처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그는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없다. 쪽지를 하나 남기고 돌아서지만 이러한 일상은 몇 차례나 반복된다. 영화는 시간을 뒤섞는다. 아니, 뒤섞는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영화는 권이 모리의 편지를 읽는 장면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며 모리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래서 영화에는 권을 찾아가는 모리의 시간만이 존재할 뿐 과거와 현재, 미래는 자리하지 못한다. 현실적인 시간이 아닌 모리의 여정 상의 시간이다. 동시에 모리는 이 영화에서 일종의 질문이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에게 묻는다.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관광인지, 일인지. 모리는 이렇게 반복되는 동일한 질문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한 얼굴을 한다.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라고. '자유의 언덕'은 모든 프레임, 단어, 규정 등을 걷어낸다. 그렇게 유도한다. 결국 남는 건 순수한 것, 본질적인 것 뿐이며, 그러니까 자유 하나다.


권은 존경의 대상이다. 모리는 그녀를 존경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나. 이 생경한 어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 모리의 여정은 권을 향한 여정이다. 물리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어느새 이 여정이 자유, 본질적인 자유로의 여정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한 공기가 갖춰진다. 그래서 영화에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 모리의 여정 상의 시간은 본질적인 시간, 실재적인 시간이다. 영화에는 유머러스한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모리가 '자유의 언덕'의 이름을 한 '지유가오카 8번가'의 주인 영선과 하룻밤을 한 뒤 화장실에 갇히는 장면이다. 카페 '자유의 언덕'은 현실이다. 그러니까 껍데기다. 하지만 모리가 향하던 곳은 현실 외부의 '자유', 실재적인 '자유의 언덕'이다. 나는 이 장면을 실패로 보았다. 본질에 다가가려 했지만 가닿지 못한 실패의 현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마지막은 모리와 영선이 담배를 피우다 말고 꺼버리는 신이다. 바로 전 신에서 권과 모리가 함께 일본으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실패가 아름다워 보였다. 모리의 여정은 실패했으나 시도는 실패하지 않았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홍상수 감독은 아름다운 실패의 세상을 만든다. 그것도 꾸준히, 성실하게. 우리는 자유의 언덕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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