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에 예외를 더해 친절함을 베푼 것이다. 친절함이 삭막함을 이겨냈다.
저녁 무렵이 다가올 즈음 나는 신주쿠 한복판에서 미아가 되어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3度目の殺人)'의 티켓을 구매해놓고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길을 잃은 것이다. 신주쿠는 수 십번을 왔음에도 이렇게 종종 헤매고 만다. 시간은 다가오고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고 거의 패닉 상태가 되어갈 때 쯤 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극장의 위치를 물었는데 그는 잘 모른다는 표정을 드러내더니 스마트 폰을 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는지 자꾸만 사방을 두리번댄다. 가슴은 조여오고 마음은 애타오고 친절함이 친절한지도 모른채 속으로 그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는 지도 읽기에 성공했고 나는 무사히 극장에 도착해 영화를 보았다. 일본은 여전히 친절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를 보러 갔을 때 나는 친절함 곁의 삭막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에비스의 가든 플레이스는 넓고도 넓었고 전시장의 입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역시나 나는 또 길을 잃었다. 그리고 또 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소를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한 남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 가던 길을 얄밉게 이어갔다. 나는 또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도 경비를 보는 남자가 위치를 알고 있어서 또 다시 무사히 전시를 보게 되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다 친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얼마 전 국내의 모 잡지에서 '일본이 변하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읽었다.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을 초대장이 없다는 이유로 내쫓았고, 큰 소리를 내며 항의를 하는 손님과 점원의 트러블 사례를 들면서였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일본은 변화를 싫어한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명확하고 원칙과 룰이 절대시대며 조금의 틈도 없이 삭막하고 갑갑한 게 일본이다. 물론 그 점이 일본의 장점이기는 하다. 변하지 않는 것, 장인 정신, 몇 대째 이어오는 가게들. 이 철옹성같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철옹성 같은 시스템은 변화에 취약하다. 상황에 유도리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트러블을 빚어낸다. 소위 말해 인정머리 없는 구석이 일본에는 여지없이 있다. 잡지의 필자는 트러블이 빚어진 상황을 예전에 보지 못했다고 썼으나 나는 10여 년 전 하라주쿠의 갭 매장에서 환불을 놓고 다툼을 빚었었고, 필자는 초대장이 없다는 이유로 손님을 내쫓는 상황을 일본의 변화상으로 썼으나 이는 철저히 원칙에 입각하는 그들의 태도의 일면에 다름없다. 그리고 10여 년 전 도쿄 영화제에선 트러블이 있었다. 대만의 감독이 자신의 국적이 타이완, 차이나로 표기된 걸 문제 삼자 일본이 나 몰라라 태도로 일관해서다. 여기에 개입하면 중국과의 관계가 불거질 거라 생각해서였을 거다.일본의 친절함 저편에는 일본의 삭막함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잡지 '브루타스'의 편집장 니시다 젠타는 검색을 해선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검색된 결과는 이미 누군가가 경험한 것이고 그는 곳 새롭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서란다. 퍼블리에서 '브루타스'와 '뽀빠이'의 리포트 작업을 하면서 가슴에 다가왔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누구나 다 가는 맛집은 가지 않기로 생각했다. 한국의 블로그, 일본의 타베로그, 그리고 인스타 그램 같은 곳에 소개된 것을 외면하기로 했다. 물론 전혀 검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쿄는 누가 뭐래도 메트로폴리탄이다. 그런 곳에서 미아가 된다는 건 서른이 넘은 나이에 달갑지 않다. 하지만 웬만하면 그저 거리를 걷다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갔고, 괜찮아 보이는 곳을 골라 길을 걸었다. 그렇게 가장 보편적인 일본의 다방, 가장 보편적인 일본의 책방이 내게 다가왔다. 그 중 한 곳은 햐쿠넨(100年)이라는 작은 책방이었는데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단출한 차림을 한 곳이다. 헌 책과 진 등을 취급하는 그곳에서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밤 하늘은 언제나 최고 밀도의 파란색이다'를 구입했다. 이 책은 이시이 유야가 연출하고 내가 좋아하는 이케마츠 소스케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져 이번에 부산에서 상영된다. 또 하나의 책방은 귀여운 이름 'Sunny Boy Books'을 가진 곳이다.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마침 그곳에선 전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책을 구경도, 살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주인은 잠깐 보고 나오는 거라면 괜찮다며 내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원칙에 예외를 더해 친절함을 베푼 것이다. 친절함이 삭막함을 이겨냈다.
내가 도쿄의 변화를 감지한 건 없어진 파르코다. 시부야 언덕길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파르코 세 개관이 모두 없어졌다. 조금은 쇼크였고 이곳에서 가방과 샌달을 사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시부야 역 한 켠에선 여전히 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아마도 2020년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함인 것 같다. 요상할 정도로 커다란 얼음과 함께 나오는 커피를 마셨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표현하고 싶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진과 얘기했으며 100엔이 올라 이제는 입장료 600엔이 된 시바 풀에서 잠시 숨을 골랐던 도쿄. 시부야에서 오모테산도까지 국도 246길을 걸으며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혼잣말을 했다. 지금 나는 왜 여기에 있는지,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나는 어떻게 될 것이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대부분이 막막함 앞에서 멈춰섰지만 한 가지 자명한 사실과 마주했다. 제대로 살자, 잘 살자. 너무 멀리 보지말고 한 보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자라는 사실과 말이다. 도쿄는 나를 사색하게 한다. 10여 년전 신주쿠에서 요츠야 사이의 길을 걷던 때가 생각난다. 추위에 볼이 얼 정도로 거리를 걷다 호텔에 들어갔는데 드라마 '파견의 품격'의 엔딩이 TV에서 흐르고 있었다. 일과 자신만 알고, 주위와 주변을 신경쓰지 않고 살던 여자가 생일 날 회사 동료들로부터 축하 카드를 받고 읽던 장면이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내 안의 외로움을 생각했던 때가 기억난다. 참 멀리도 왔고 참 여전히 같은 자리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은 더 성숙하게, 조금은 더 신중하게 한 보를 내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포스트 디자이너 카메쿠라 유사쿠와 'On the table'이란 전시를 보고 집에 간다. 조금은 더 신중하게, 조금은 더 성숙하게. 잘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