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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20. 2017

살다(生きる)를 포기하고
생활하다(暮らす)를 선택하다

그래서 생각한다. 일년을 살지 말고 하루를 365번 살자고. 

'나, 다니얼 블레이'를 떠올리게 하는 하루다. 공문서를 뽑을 게 있어 동사무소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여러가지를 설치하라고 메시지가 뜬다. 그럴 줄 알았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꾹 참고 따라서 하니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를 해결하려면 프로그램 하나를 삭제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 한 번 따라하니 20분이 넘게 걸린다. 삭제 이후에도 오류는 여전하다. 참고있던 화는 치솟기 일보직전이다. 결국 문서는 뽑지 못한 채 컴퓨터를 껐다.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약으로도, 무엇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으니 스스로 다스려야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계속 실패를 하지만 애를 쓴다. 오늘 역시 그랬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화를 안고 씩씩대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금 전 전화도 엄마였다. 나는 화를 낼 대상을 찾기라도 했던 듯 짜증이 섞인 투로 엄마에게 '알았다'고만 말했다. 엄마는 '컴퓨터 잘 안되면 엄마가 동사무소 다녀올까?'라고 하셨다.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를 봐서라도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정말 그랬다. 난 항상 엄마에게 미안하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착한 아이가 되자고 결심하고 밖으로 나섰다. 날씨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내가 타려던 905번 버스가 코 앞을 지나갔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최소한 내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볼 일을 마치고 또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타야할 754번 버스가 또 다시 코 앞을 지나갔다. 허탈했다. 운이 좋지 않은 것도 한 번이면 괜찮지만 몇 번 반복되면 혹시 무슨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게 사람 심리다.


배가 고파 스타벅스에 가 양파가 들어간 (아마도) 새로 나온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이거 꽤 맛있다. 스타벅스 샌드위치 중 제일 좋았다. 옆집이 호떡을 팔고 있어 사람 수대로 사 들고 또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식기 전에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에 택시를 탈 생각도 잠시 했지만 한국에서 택시를 타고 유쾌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역시나 버스는 빨리 오지 않았다. 대기 시간 4분이 여러 차례, 2분이 여러 차례를 거치고 나서야 도착했다. 아파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엘레베이터가 1층에 와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나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그 찰나, 엘레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2. 3. 4...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의식 중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질 수 없다 생각했다. 고작 엘레베이터 하나에, 고작 두 번 코 앞에서 놓친 버스에 내 기분을 맡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엄마를 생각했다. 항상 나를 생각하고 바라봐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무의미한 성질을 부려서는 안되겠다 생각했다. 그런 나로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죄스러웠다. 그래서 세상엔 이런 날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모든 게 다 의미를 갖는 건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엄마는 호떡이 맛있다고 하셨다. 다행이다.


나름의 맺음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글에서도 두 번이나 적었다. 일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났고 11년 째도 일년 남짓 남았다. 그래서 모든 게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조금만 어긋나도 의미를 찾게되고, 개꿈일지 모를 꿈에 해몽을 하려 든다. 얼마 전 일본의 여배우 키시이 유키노가 록밴드 요기 뉴 웨이브의 보컬 켄고와 가진 대화에서 한참을 생각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녀는 '산다(生きる)고 생각하면 헤매고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생활(暮らす)한다고 생각하면 헤매고 있어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나를 두고 하는 말처럼 다가왔다. 매순간을 생활이 아니라 삶으로 마주했기에 버거웠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다. 크게 보되 지금에 집중하자, 일년을 살지 말고 하루를 365번 살자고. 키시노는 나보다 열살이나 어리다. 세상은 나이로만 사는 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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