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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22. 2017

Let the Sunshine In

다만 말해보려 한다. 오픈, Open.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자고.



시간이 끊겼다. 2016년 어느 여름 오후 이후 내게 시간은 멈춰섰다. 엄마는 이 날이 같은 해 10월 31일이라고 하시지만 내게 그 날은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일만큼 무더웠던 어느 여름의 오후 무렵이다. 여느 평일의 오후처럼 거리는 한산했고 아이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이 생생하다. 왜인지 가봐야할 것 같았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프고 힘들 때면 생각나곤 하는 그 날의 오후 무렵을 이제는 지워야 할 것 같았다. 유아인을 닮은 남자와 차돌배기 덮밥, 그리고 먹다 남은 오렌지 반 조각. 집에 돌아온 난 약을 먹었고 머리가 휘청거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두 통의 전화가 있었다. 누나는 119에 전화하라고 말했고, 나는 그렇게 했었다. 지독히도 끝나지 않는 이 30분 남짓의 기억이 내 곁을 떠나가지 않는다. 왜인지 달콤하고, 왜인지 따뜻하며, 왜인지 편안하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이제는 느낀다. 그래서 가봤다. 내가 살던 곳, 내가 고작 3개월을 생활했던 곳, 논현로 155-37로.  



클레어 드니의 '렛 더 선샤인 인'을 보고 나오니 빵집에서 프렌치 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생각을 더듬었다. 오픈, Open. 주인공 이자벨이 방황과 혼란의 끝에 마주하는 단어다. 영화가 나에게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산에서 봤을 때보다 더 농밀했고 더 깊숙이 다가왔다. 늦은 점심을 먹었던 가게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검정 간판에 아마도 신발을 파는 것처럼 보이는 가게가 새로 생겼다. 그런데 왜인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어디서 점심을 먹었던걸까. 실제로 먹기는 했던 걸까. 시간이, 기억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건물로 가보았다. 여전히 풀무원 생수 트럭이 주차되어 있다. 1층은 악세서리를 파는 가게다. 주인집 딸이 운영하고 거기서 은반지를 맞췄었다. 새하얗던 외벽이 빈티지 느낌의 진녹색으로 변해있다. 신구 초등학교와 신구 스포츠센터, 초조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를 기다렸던 카페 피카와 규동집 지구당을 거쳐 압구정 역으로 걸었다. 마음이 허무했다. 무얼 기대하고 여기까지 왔나 싶은 마음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나는 아마도 시간을 더듬으려 했다. 타의로 이사를 했고 그렇게 지워졌던 시간을 애써 찾아내 내 손으로 지우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 논현로 155-37에, 2016년 어느 여름의 오후는 없었다.



'렛 더 선샤인 인'에서 이자벨이 읽는 책의 제목은 '실패의 미덕'이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나는 이제 실패의 미덕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한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때 내게 남아있는 건 상처나고 모난 실패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20대가 앞으로의 30대를 만드는 것이라면 지나간 실패가 할 수 있는 일도 분명 이 세상에는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 새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자꾸만 쓰고 말하고 생각하려 한다. 작은 희망도 부서질까 겁이 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나다. 하지만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용기는 필요하다. 일년만에 살던 집에 다녀오니 지나간 시간은 어쩌면 지금이, 현재가 완성해 나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지금을 더할 순 있다. 그렇게 과거는 보다 나은 기억으로 완성되는 게 아닐까 싶다. 갈림길 사이에 서있다. 빵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과 공항에서 일하며 일본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 주저도, 망설임도 있다. 둘다 내가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다. 무엇을 선택하게 될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다만 말해보려 한다. 오픈, Open.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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