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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31. 2017

키리시마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덜 자란 나무, 덜 핀 꽃, 덜 익은 열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간다

금요일이다. 금요일. 또 금요일이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키리시마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에는 같은 날이 몇 차례 반복된다. 같은 듯 다른 날과 날이다. 아이들은 친구와 수다를 떨고, 방과 후 활동을 하고, 배구를 하고, 배드민턴을 친다. 특별할 거 없는 학교의 일상이 학생들의 선상에서 오밀조밀하게, 동시에 드넓게 펼쳐진다. 영화에 커다란 드라마나 사건은 없다. 그저 작고 작은 일들이 자갈 굴러가듯 소리내며 움직인다. 일본 영화가 잘하는 짓이다.


하나의 사건은 있다. 마에다(카미키 류노스케)가 이끄는 영화 동아리가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직접 시나리오를 써 담당 선생에게 검사를 맡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영화를 찍고 싶다. 선생은 반대를 한다. 학생들은 반발을 한다. 부딪히고, 부딪히고, 또 부딪히고. 학생들이 이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싶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좀비 영화다.


영화는 하나의 의구심을 풍기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타이틀에 등장하는 키리시마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학년 몇반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부활동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등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그저 달리기만 한다. 주어진 유일한 정보가 있다면 그가 부활동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 아이들은 키리시마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농구부는 물론, 취주악부 학생도, 공부 못하는 학생도 모두 키리시마에게 달린다.  


키리시마가 없는 대신 영화엔 하나의 구심점이 있다. 바라보고 달려갈 목표, 꿈, 이상과 같은 것이다. 도달하기 힘들고, 손에 넣기도 힘들지만 달려갈 의지와 힘은 존재하는 상황, 그 연속성. 영화는 청춘의 에너지를 구심점을 향한 힘으로 구현한다. 그래서 키리시마는 지금 존재해선 안된다. 쉽게 손에 잡히면 안된다. 아직 얻지 못했기에 소중해지는 것이 있다. 도착하지 않았기에 더 갈 수 있는 거리가 남아있다. 영화는 청춘을 이렇게 덜 자란 나무, 덜 핀 꽃, 덜 익은 열매로 그려낸다. 앞으로가 있다는 것, 미래가 남아있다는 걸 키리시마라는, 현재엔 없는, 하지만 존재하는 사람에 반영해 표현해 내는 것이다.


트럼펫을 부는 여학생이 옥상을 고집하고, 영화 동아리가 찍는 영화가 좀비 영화인 것도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나아가는 어떤 힘, 일상의 생명과 관련있을 것이다. 키리시마가 있을 줄 알고 찾은 옥상에서 영화 동아리 부원, 농구부 학생들, 여학생들이 뒤엉켜 좀비의 한 판을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하지만 요시다 감독은 피 칠갑의 질펀한 장면을 보내버리고 8mm 카메라를 한 학생 히로키(히데시마 마사히로)의 얼굴에 가져다 댄다. 키리시마 못지 않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저 평범한, 부활동도 하지 않는 그의 눈빛에 집중한다. 학생은 울컥하고 만다.


영화는 어쩌면 영화 동아리 회장인 마에다를 빌려 히로키를 움직인 것인지 모른다. 아무런 열정도 없이 매일을 복습해 가는 학생의 일상을 하나의 어떰 점으로 이끌면서 말이다. 우리에겐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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