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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Dec 07. 2017

가족이란 말이 아픈 사람이 있다

두 아빠의 딸, 두 엄마의 아들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가 이야기하는 가족


게이에게도 부성이 있다. 레즈비언에게도 모성이 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해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아이를 갖고 가족을 이루고 싶은 욕망은 성정체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일반화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일본은 보수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차이를 받아들이는 면에서 우리에 비해 꽤나 관대하다고 느낀다. 시부야 구에서는 동성 커플을 인정하는 조례안이 가결됐고, 마츠코 데락스, 잇꼬 등을 비롯 성의 구분이 애매모호한 탤런트들은 TV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잘도 나온다. 심지어 우에노 주리와 같은 톱 클래스의 배우가 레즈비언 역할을 연기하기도 한다(드라마 '라스트 프렌즈'). 2013년 1월 일본에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모색케 하는 드라마가 한 편 방영됐다. 제목이 '사토네의 아침 식사, 스즈키네의 저녁 식사(佐藤家の朝食、鈴木家の夕食).' 사토네 집은 엄마가 둘이고, 스즈키네 집은 아빠가 둘이다.  



동성애가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이 있다.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삶의 단계와 만날 때가 그렇다. 일부 나라에선 동성혼을 합법화하고 그런 기류가 점점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동성애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 진입하지 못한다. 동성혼이 합헙화된다고 해도 그 가정은 엄연히 대부분이 생각하는 보통의 가정과는 다르다. 동성애가 가족과 만났을 때 동성애는 개인에 문제에 머무르지 못한다. 입양한 아이의 삶과 부딪히고 체외 수정으로 낳은 아이의 정체성과 어긋난다. '사토네의 아침 식사, 스즈키네의 저녁 식사'에서 역시 그렇다. 드라마의 초반,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보통의 가족을 그린다. 두 아빠의 딸 소라는 오또상, 파파라 둘을 달리 부르며 일상을 문제없이 살아가고, 두 엄마의 아들 타쿠미는 밖에서 일하는 엄마, 안에서 일하는 엄마 품에서 별 문제 없이 살아간다.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이기에, 다양성을 품는 나라이기에 가능한 드라마다. 다름마저 품어낼 때 가족은 완전한 가족이 된다.




어제 엄마와 크게 부딪혔다. AMI의 니트 하나가 없어졌다고 말했을 뿐인데 엄마는 또 내가 일본 가서 버렸다는 투로 말씀하셨다. 힘들다고 하면 더 힘들다고 하시고 홀로 방안에 틀어박혀 몇번을 울었다고 하면 자면서도 우신다고 하신다. 가족이어도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엄마 아들이어도 공감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나이를 들면서 점점 느낀다.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그려진다. 소라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는 한 어린 여자 아이의 모습을 보고 '엄마의 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라의 파파는 소라의 손을 꼭 잡아주지만 그의 손은 엄마의 손이 아니다. 파파는 '쓸쓸해진다'며 눈물을 흘린다. 상처와 상처가 만났을 때 불행하게도 치유는 되지 않는다. 소라에겐 소라의 삶이 있고, 파파에겐 파파의 삶이 있기에, 둘이 함께가 된다는 건 이해와 공감을 넘어선 영역이다. 사토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파트너의 난자를 동생의 정자와 체외수정해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 타쿠미는 혼란에 휩싸인다. 그에게 자신은 씨없는 수박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다치는데 가족이란 벽은 견고하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눈물을 떨군다. 나 역시 그랬다.



엄마 앞에서 난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고, 흘린 눈물도 그저 분에 겨워 흘린 짠맛나는 물에 불과하며, 홀로 안은 상처도 내가 잘못해 생긴 생채기에 다름아니다. 말을 하면 할 수록 이 느낌은 점점 더 진해진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게 엄마에겐 엄마의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으며, 세월이 있다는 것이다. 소라의 파파가 소라에게 안겨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어쩌면 이런 게 어찌할 수 없이 우리가 살고있는 삶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찌할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찌할 수 없이 울고, 어찌할 수 없이 아파하며, 어찌할 수 없이 마음을 다독여 스스로 일어나는 삶.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다. 외면받은 눈물은 가슴 깊숙이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이 또 다음을 살아야한다. 어찌할 수 없이 엄마라 불러야 하고, 어찌할 수 없이 가족의 1인이 되어야 하며, 어찌할 수 없이 함께여야 한다. 상처가 상처를 만나 치유될 순 없지만 어찌할 수 없이 살아가는 용기는 준다. 혼자가 아니니까, 가족이니까, 함께니까 어찌할 수 없이 사는 삶. 이미 최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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