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는 꿈을 꾼다. 기생에서 펼쳐진 한 자락의 영화.
어쩌면 새로운 장르가 태동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액션이나 로맨스, 코미디나 스릴러와 같은 틀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장르가. 일본 영화에 작은 흐름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로 불을 지폈고 몇몇의 공포 영화, 그리고 오다기리 죠나 카세 료, 아오이 유와 같은 배우의 영화로 시장을 키워나갔던 일본 영화가 배우도, 감독도, 장르도 아닌 어떤 감정의 맥락에서 자리를 넓히고 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 '일주일간 친구' 등. 제목부터 별난 이 영화들은 크진 않지만 나름의 수익을 냈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나 올해 10월 개봉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46만 관객을 동원하며 41만 관객수를 기록했던 2014년 영화 '주온: 끝의 시작'을 넘어섰다. 패션지 '멘즈 논노'의 모델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사카구치 켄타로 주연의 '너와 100번째 사랑'을 연출한 츠키카와 쇼 감독의 작품이다. 올해 5월에 개봉한 '너와 100번쨰 사랑'은 8만 관객 동원을 기록했다. 이 영화들은 소재가 제각각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고,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회사 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동창생을 사칭하며 나타난 유령과 맺는 관계를 그린 드라마며, '일주일간 친구'는 일시적 기억 상실을 앓는 여학생과 그의 친구가 되려 애쓰는 남학생의 우정담이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디 하나 티 없이 맑은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이뤄진 세계, 그런 리듬으로 흘러가는 시간. 일본 영화는 꿈을 꾼다.
진심을 길러내기 위해 이들 영화는 만화적인 상상을 가져온다. '너와 100번재 사랑'의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레코드,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환생과 유령과의 공존 등.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이들 영화가 어떤 흐름의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와 감독의 면면 덕택이다. '너와 100번째 사랑'과 '너의 췌장이 먹고 싶어'의 츠키카와 쇼,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의 미키 타카히로,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의 쿠마자와 나오토,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의 코이즈미 노리히로 등. 별 유명하지 않는 이름들이다. 쿠마자와 나오토의 경우 비교적 알려지긴 했지만 브랜드가 될 정도의 이름은 아니다. 반면, 배우들의 이름은 앞으로의 일본 영화를 예감하게 한다. '너와 100번째 사랑'의 사카구치 켄타로는 드라마 '코우노도리'에서의 연기로 모델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말끔히 떼어냈고,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후쿠시 소타와 쿠도 아스카는 스다 마사키, 이케마츠 소스케 이후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으며,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에서 후쿠시 소타와 함께 연기한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요시다 다이하치의 '키리시마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로 우울과 불안의 페르소나로 인상을 선명히했다. 그런데 이들 영화는 모두 소설이나 만화가 원작이다. 오리지널 작품은 한 편도 없다. 그러니 일본 영화의 자장 안에서 길어진 작품이라 말하기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감독의 색깔보다 원작의 정서로 만들어진 작품이 이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고 영화의 필터를 거쳐 관객에게 도착한다. 심지어 판타지가 뒤섞인 순수와 진심의 세계로 수렴된다. 기생에서 펼쳐진 한 자락의 영화다.
어쩌면 장르가 의미를 상실한 건 이미 오래전 일일지 모른다. 애초 장르는 영화 업자들이나, 통계나 아카이빙을 하는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붙여놓은 이름표에 불과하다. 예술이란 영역에 예술 이외의 어떤 말도 자리를 갖지 못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어떤 장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금지의 장벽이 풀려 호러, '러브 레터'로 대변되는 로맨스로 이해됐던 일본 영화는 해지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장르로 소비되지 않는다. 그 대신 등장한 건 어느 스타일이나 감독의 이름이다. 느긋하게 삶을 관조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무 것도 없는 듯한 세계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표현하는 오기가미 나오코,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으로 삶의 어떤 찰나를 응시하는 요시다 다이하치, 사라져가는 것들의 시간을 독자적인 앵글 안에 담아내는 가와세 나오미, 치열함 자체가 영화의 형식이 되어버린 히로키 류이치 . 특히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오래된 작품과 가장 따뜻한 신작이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다. '세 번째 살인'은 그간 가족 드라마 류의 온화한 작품을 선보였던 그가 법정 심리극에 도전한 작품이다. 심리 스릴러라 할 만큼 후루야마 마사하루와 야쿠쇼 코지의 긴장감 넘치는 숏이 인상적이다. 그가 거의 20년 전, 두 번째 장편으로 완성한 '원더풀 라이프'는 천국으로 가는 중간 역, 림보라 불리는 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7일을 그린 작품으로 그의 영화에 관통하는 사라지고, 떠나가는 것의 서사가 흐른다. 더불어 오기가미 나오코도 변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는 거의 무에 가까웠던 그의 영화에, 스토리가, 그것도 굵고 진한 이야기가 하나의 결실을 맺은 작품이고, 아직 개봉이 정해지지 않은 히로키 류이치의 신작 '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는 후쿠시마 원전 이후의 삶을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아름다운 눈물로 엮어낸 작품이다. 별난 이름과 함께 다가온 일본 영화, 그 안엔 진심과 순수한 마음이라 밖에 수식할 수 없는 세계, 그리고 지금의 일본 영화를 얘기하는 감독들과 내일을 예감케 하는 배우들의 이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