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끝나지 않은 건 세상이 아니라 나일 뿐일지 모르겠다.
일본 문화원에서 모임이 있는 날. 머리 예약을 오후 2시 반으로 잡았다. 오레노 라멘에서 점심을 먹을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점심이 시작되기 전, 아침이 남아있는 시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버스가 막히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있기 힘든 일이라 창밖을 내다봤다. 평창 마스코트 수호가 실린 트럭이 반대쪽 차로를 가고 있었고 뒤이어 성화 봉송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짜증이 나려 했지만 웃음이 나왔다. 합정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러 가는데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였다. 아직 지나가지 않은 시간이, 2017년의 어느 날이 흘러갔다. 미용실에 갈 때면 항상 사진을 가져간다. 오늘 역시 그랬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머리를 하고 싶었다. 일본에서 일 할 때 항상 200엔 짜리 콜라를 주문하던 어느 남자의 머리 스타일이다. 손가락엔 굵지 않은 은반지를 끼고 있었고, 매번 같은 걸 주문하면서도 신중히 메뉴를 들여다봤다. 눈가에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그 남자의 머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했다. 10년도 더 전에 그렸던 모습이 드디어 다가왔다. 아오이 하나에 가 황금 개띠를 맞아 출시된 강아지 빵 2종을 사고 다시 버스를 탔다. 기분이 아리송해졌지만 애써서 달랬다. 아직 남아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울렛의 철지난 옷들과 선거가 지나고도 남겨진 찢어진 포스터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말해지지 못한 마음들. 그건 어쩌면 애절함이고 멜랑꼴리일지 모르겠다. 자주 낙심하고 많이도 우는 나지만 오늘은 멜랑꼴리하다. 그러니까 웬일로 기분이 좋다.
점점 작아지는 세계가 무겁게 다가오던 날, '두 개의 사랑'을 보았다. 긴 머리를 잘라내는 다소 섬뜩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유 없이 불안한 여자 끌로에의 삶을 들여다본다. 물론 이유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녀는 단 한 번의 섹스로 태어났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존재로 살면서 엄마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원인 모를 복통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프랑소와 오종은 거울에 비친 끌로에와 갤러리에서 지킴이로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점점 희미해지는 어떤 존재의 초상을 그려낸다. 이야기는 신비롭게 흘러간다. 심리 상담을 받는 끌로에와 그녀의 의사 폴의 대화는 은밀하고 농밀하며 둘의 동거 이후 밝혀지는 폴의 쌍둥이 형 루이의 존재는 이들의 삶에 새로운 차원을 더한다. 폴에 이어 루이와도 사랑에 빠지는 끌로에는 흡사 사랑의 미로를 풀어내는 실마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종은 이에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울 쌍둥이'란 존재에 대해 길게 설명하며 이야기를 미로와 혼란 속에서 건져낸다. 남아있는 건 매우 현실적인, 그러니까 다소 진부한 결론이다. 매우 아쉽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존재에 대한 투쟁을 현대 사회의 주요한 화두로서 제기한다. 그리고 그걸 사랑과 욕망으로 색칠한다. 매우 그다운, 동시에 혁명적인 발언이다. 오종의 이 영화를 끝내 밀어낼 수 없다.
람프의 기타리스트 소메야 타이요가 사진을 보내왔다. 무슨 사진일까 의뭉스런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봤다. 람프가 누군가와 마주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그 곁에 내가 있었다. 오래전 기억이 샘솟았다. 아마도 어느 영화제에서 샀던 명함 지갑과 써스데이 아일랜드에서 구입한 체크 셔츠, 그리고 아디다스의 캡을 쓴 내가 있었다. 개인적인 애정으로 인터뷰를 하자고 우겼었고 그렇게 OK를 받아 마감과 마감 사이 이들을 만났었다. '오늘 밤도 너에게 텔레폰 콜 今夜も君にテレフォンコール', '밤 바람 夜風’를 들으며 홍대 언저리를 헤맸고, 뭐라도 좀 바꿔보겠다며 발버둥쳤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직도 2016년 속에 있다고 느꼈다. 모두가 새해를 맞이할 때 상실과 우울 속에 있었다. 그런데 정말 모르는 것 같다. 사람 일이,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책장을 정리하며 '아저씨 도감'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다혜 선배가 '씨네21'에 소개한 글을 보고 갖고 싶어 누나에게 말해 받았던 책이다. 누나는 입원 중인 내게 뭐 갖고 싶은 책 없냐고 물었다. 아마도 심심할, 따분하고 지루할 나의 시간을 생각했을 거다. 그런 애씀이 소중하다. 사랑스럽다. 놓치지 않고 간직하고 싶다. 어쩌면 끝나지 않은 건 세상이 아니라 나일 뿐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별 거 아닐지 모르겠다.
남들과 비교해도 상관없다고, 죽을만큼 넘어져도 찾을 수 있는 소중한 보물도 있다고 노래하는 유즈의 노래를 들으며 어쩌면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 사는 거 별 거 없고 그렇게 젠체할 필요도, 조심할 필요도 없으니까. '잠깐 울고 오겠습니다'라고 생각 중인 에세이 집의 제목을 지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