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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21. 2018

오즈 야스지로 곁에 살다, 꽁치의 맛

오즈의 계절은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아니고, 그냥 지금이다.


기타노 타케시에게 가족은 보지 않으면 버리고 싶은 존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가족은 결핍으로 드러나는 시간이고, 일본의 모델 겸 수필가 마에다 에마는 가족은 타인이라고 썼다. 여러가지 갈래로 설명되고 여러가지 말들로 정의되는 가족은 생각하기에 따라 정반대의 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단어의 마지막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본다. 그의 영화에 가족이 그려지지 않는 작품이 없고, 가족으로 인해 인간이 겪게되는 딜레마와 그렇게 흐르는 시간이 오즈의 영화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혼자인 인생이 가족이란 굴레 안에서 어쩔 수 없이 함께가 되는 삶의 역설을 그는 쓰디쓰지만 따뜻한 온도로 아우른다. 그의 영화를 보면 묘하게 스산한, 하지만 풍만한 느낌을 받는 이유다. '꽁치의 맛'은 오즈 야스지로가 숨을 거두기 한 해 전인 1962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스물 넷의 딸과 함께 사는 히라야마의 가정을 중심으로 인생의 썰물과 밀물이 혼재하고 결혼과 죽음이 동거하는 기묘한, 하지만 진리에 가까운 삶의 초상을 그려낸다. 이별(결혼)을 놓친 시간은 가족이란 시간 속에 멈춰서고, 그렇게 가족은 개인의 시간을 잠식한다. 표주박이라 불리는 히라야마의 은사 효탄의 삶이 대변한다. 어차피 외톨이. 영화를 꿰뚫는 주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즈 야스지로가 가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족 안에서의 개인을 응시하고, 거기서 삶의 진리를 끌어낸다. 어찌할 수 없이 함께인 시간 속에 혼자를 바라보는 것. 오즈의 영화다. 



영화에는 두 개의 거짓말이 등장한다. 하나는 젊은 아내를 새로 맞았다는 히라야마의 친구 호리에가 죽었다는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히라야마가 딸 미치코의 맞선 상대로 점찍어뒀던 남자가 이미 다른 사람과 선을 보았다는 거짓말이다. 영화에선 다소 코믹하게, 그저 친한 친구들의 장난으로 그려지지만 나는 거짓말 뒤에 숨은 어떤 진실된 시간을 보았다. 친구들은 말한다. '거짓말이라 다행이야'라고. 하지만 그 순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인생은 거짓말이 아니야'라고. 안타까움과 슬픔의 서로 다른 거짓말이지만 둘은 퇴장이라는 하나의 세계로 수렴된다. 새로운 가정이 좌절되고, 혼자의 시간이 연장되는 인생과 죽음과 함께 완전한 혼자가 되는 시간. 오즈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고, 어차피 우리는 외톨이다. 영화에 꽁치는 등장하지 않는다. 생선이 소재가 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등장하는 건 꽁치가 아니라 붕장어다. 효탄은 생선의 맛에 감탄한다. 그는 붕장어가 붕장어인지 모르고 생전 먹어본 적이 없다. 안쓰러운 시간이 흐른다. 지나간 시간들이 아픔이 되어 남는다. 썰물의 시간이고 꽁치는 썰물의 맛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 장면이 아니지만 딸을 시집 보내고 히라야마가 힘 없이 주방에 가 물을 따라 마시는 장면은 내게 시작을 의미하는 엔딩이다. 퇴장에서 내일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물이 나려했다.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 아니고 함께라서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고독은 그저 삶의 한 자락으로 자리한다. 



미치코의 삶은 쉽게 보면 가족에 발목 잡힌 안타까운 인생이다. 아빠 때문에, 어린 동생 때문에, 그러니까 집안일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삶을 그렇게 단편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가족을 개인을 억압하는 단순한 조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즈의 영화엔 늘 삶에 대한 넓고 깊은 성찰이 있고 그것이 영화를 현실에서 가장 가깝게, 동시에 매우 멀게 위치시킨다. 아무리 싫어도 가족 없는 사람 없고 아무리 독립적이어도 온전한 혼자 없다. 세 번의 입원과 퇴원을 하면서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시간이 엄마와 누나들이 느끼는 시간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가족이라고 다 좋은 것만 보고 사는 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 엄마도 그저 또 한명의 사람이며, 그러니까 타인이라는 걸 아프고 나니 알았다. 솔직히 낯설었다. 조금은 두려웠다. 엄마가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처럼 연기를 하며 살아야하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인생은 모순이다. 혼자이지만 함께인 게 삶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가 소중하다. 그의 영화 곁에선 아파도 아프지 않을 수 있고,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오즈의 계절은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아니고, 그냥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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