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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03. 2018

말이 아닌 어디, Pina

아직 끝나지 않은, 하지만 아름답고 빛나는 그 시간이 흘러간다.


눈을 감고 춤을 춘다. 남자의 상체를 한 여자가 서성이고, 그 곁엔 하마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수십번이나 안겼다 뿌리치고, 마치 바위를 깨기라도 하겠다는 듯 무수히 많은 물을 퍼붓는다. 언어를 벗어난, 몸의 언어로 구현된 풍경이다. 영화는 최대한 언어를 피하려 한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말하는 이들의 모습이 아닌 정지해 웃고 있거나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단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없는 표정이, 얼굴이 어느 순간 어떤 떨림과 설렘, 그리고 애잔함과 고독을 드러낸다 독일의 무용수 피나 바우쉬를 기리는 빔 밴더스의 영화 '피나' 얘기다. 물론 이 중 몇몇은 나의 해석이고 상상이다. 일본의 시인 사이하테 타히는 오늘의 언어는 남용과 오용으로 인해 의미가 피폐해졌다고 말하며, 진부한 표현을 오히려 더 진부하고 노골적으로 사용한다. 아름다운 건 더 아름답다고, 슬픈 건 더 슬프다고 시를 쓴다. 시는 운율과 심상으로 언어의 세계에서 이탈한다. 때로는 노래와 만나 가사가 되기도 하며 그 때 멜로디, 울림, 템포, 그 모든 것을 품은 어떤 공기는 시를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시킨다. 미술은 이미 그림이라는, 언어 바깥의 예술이며, 음악은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최상의 예술이다. 영화가 말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빔 밴더스가 언어를 조금도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피나'는 최대한 언어를 피하려 애를 쓴다. 인터뷰와 인터뷰 사이를 피나의 춤이 연결하고, 그렇게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슬픔, 그리고 고독이 표현된다. 영화엔 '카페 뮐러'란 작품이 인용된다. 아마도 빔 밴더슨의 연출로 재연됐을 그 춤은 언어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고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 그곳에 있다. 

바람에 담배 재가 떨어졌다. 재의 자리를 쫓으며 그냥 있었다. 유난히 오른쪽 귀가 시려와 몸을 조금 틀었으나 여전히 바람은 매섭게 오른쪽 귓볼을 때려온다. 버스를 한 대 보내고 벤치에 앉아 그저 자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길가의 이름 모를 풀, 무뚝뚝한 표정의 가로등과 정돈된 보도블럭 사이의 크고 작은 돌부리들. 그 곁에 언제가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 하늘 쥐 한 마리의 시체가 놓여있다. 어쩌면 맨홀일지 모를 어둠이 그렇게 놓여있다.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져 마음을 띄어본다. 흔들, 흔들, 흔들, 흔들. 그렇게 있고 싶다 생각한다. '흔들림 속에 있다.’, Be in the Woble, 揺れの中にいる. 아직 끝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음악의 엔드롤, 뜨거웠던 한낮의 공기를 머금고 잠을 미루는 여름밤, 꿈의 다음을 찾아 조심스레 눈을 감는 어느 새벽녘과 아직은 어두운 어느 아침. 모두의 시간에서 잠시 이탈하고 나만의 감각으로 자리하는 이 세상이 여기 아닌 어딘가에 분명 존재한다고 느낀다. 미완성의, 아직 끝나지 않은, 하지만 아름답고 빛나는 그 시간이 내 자리 어딘가에서 흘러간다. 재미가 느껴졌다. 이런 게 재미란 건가 싶은 느낌이 들었다. 버벅거리고 식은 땀을 흘리고 내내 초조하고 긴장했지만 동시에 내 어디 한 구석엔 재미란 것도 있었다. 그렇게 야속했던 시간이 달콤하게 다가와 상처를 지워줬다. 죽음 앞에서 생각을 하자며 베토벤의 어느 교향곡에 귀기울이던 어느 남자의 영화가 떠올랐다. 수상한 기운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희한한 세계를 암시한다. 그 세계의 거리엔 벨벳이 깔려있고, 잿빛 하늘이 아름답게 빛나며, 당신의 옆모습이 아른거린다. 그 곳을 향해 걸어간다. 지나간 시간이 거름이 되진 않지만 누군가가 내뱉은 한숨이 오렌지 빛으로 물든다. 'New York'이라 쓰여진 티셔츠를 사고, 빵을 고르고 군고구마를 담아 버스를 타는 시간. 지금까지의 나고, 오늘부터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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