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의 엔드롤은 끝나지 않았다
25시간. 하루하고 60분. 쌓아올린 망루가 자리도 채 잡기 전, 폭력이 급습했다. 살 곳을 보장하라는 요구는 크레인에 묵살됐고, 주거권이란 세 글자는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다. 연분홍치마가 '두 개의 문'에 이어 제작한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은 2009년 1월 20일 새벽의 용산, 그 후를 기록한 결과물이다. 참사로 미화된 학살의 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9년이란 시간이 희석한 아픔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무기력하게도 남아있는 건 희미해진 기억이고, 흐릿해진 시간이다. 용산은 어느새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저물고있다. 그래서 연분홍치마는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간을 기록하고, 아픔을 되내이며, 참사를 지금으로, 현재로 확장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아픔이기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고통이기에 이들은 1편 '두 개의 문'에 이어 스핀 오프 격의 2편 '공동정범'을 내놓았다. 같은 시간을 사는 한 시대의 구성원으로서 묵직한 용기이고, 정직한 결단이며, 아름다운 인내다.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
'두 개의 문'은 2009년 어느 새벽의 미스테리에 접근한 기록이다. 무리한 진압, 원인 모를 화재, 은폐된 사체, 숨겨진 3000쪽 만으로도 확연히 드러나는 졸속 수사에 대항해 영상으로, 증언으로, 기록으로 맞서 싸운 결과물이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연분홍 치마는 그 싸움의 시간을 참사 후 9년이 지난 지금으로 데려온다. 학살 이후 남겨진 것들을 바라보고 좌절이란 이름의 상처를 응시하며 꺾여버린 의지와 아이러니한 죄책감의 시간을 담아낸다. '두 개의 문'이 그랬던 것처럼 '공동정범' 역시 편향적인 프레임에 빠지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싸움일지라도 내연을 들여다보고 보다 본질의, 보다 의미있는, 보다 미래적인 이야기를 길어낸다. '두 개의 문'이 경찰 특공대 역시 피해자였다는, 그러니까 가해자가 피해자이기도 했다는 시간의 딜레마를 품었듯이, '공동정범'은 단순히 철거 폭력에 의한 피해자의 시간을 그리는데 머물지 않는다. 아빠의 죽음을 뒤로 탈출을 해야했던 시간, 동료들을 두고 먼저 도망을 가야만 했던 시간을 얘기하며 사람을 인간에의 회의 문턱까지 끌고간 폭력을 폭로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넘어 이야기했으나 가해자의 자리는 점점 선명해지는 현실, 거기에 남는 건 오직 MB란 이름 뿐이다.
영화는 몇 개의 챕터로 구성됐다. 순서대로 열거하면 가정의 파탄, 남겨진 이의 무게, 사건 당일을 직시하는 시간, 치유로 나아가는 시간 정도다. 어느 하나 쉽지 않았을 것 같고 어느 하나 순탄하지 않았을 것 않다. 당일의 기억을 회고한다는 건 우리같은 이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연분홍치마는 그것을 해냈다. 나아가 농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아마도 2009년 1월 20일 이후의 시간을 용산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투쟁의 시간 안에 있었을 것이다. 가장 가슴에 다가왔던 건 농성자 사이의 불화를 담아낸 대목이다. 위원장이었던 이충연과 용산이 아닌 다른 철거 지역에서 연대를 온 이들간의 부딪힘을 영화는 꽤 오랜 장면을 할애해 담아낸다. 특히나 이충연 위원장의 말은 처음엔 고집처첨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장면이 거듭될 수록, 말이 쌓여갈 수록 이충연 위원장의 아픔이 전해진다. 먼저 탈출했다는 죄책감, 도덕적 고뇌,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이 끝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보여준다. 치열하게 쌓여간 장면이 치유라는 시간 안에 녹아들고 모든 상처와 아픔의 분노는 MB를 향해 끓어오른다. 공감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며, 행동하게 하는 다큐멘터리. 그 곁엔 지난한 시간을 인내하고, 아마도 울고 참아내며 버텼을 연분홍치마가 있었다.
1월 20일은 용산 참사가 9년째 되는 날이다. 이 날 오후 5시 인디스페이스에선 추모식이 열렸다. 통일문제연구 백기완 소장을 비롯 진선미 의원, 종교계 인사들과 유가족 분들이 참석했고 만석에 계단에까지 앉아가며 영화가 상영됐다. 곳곳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특히나 MB가 나온 대목에선 나도 욕을 하고 말았다. 백기완 소장은 용산 참사는 참사가 아니라 학살이라 얘기했고, 주범이 누구냐며 물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MB란 함성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공동정범'은 선동적인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농성자들의 편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농성자들의 잘못과 미운 시간도 담아낸다. 최대한 균형을 잡으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소감은 분노와 분노다. 행동과 행동이다. 농성자 다섯이 죽었지만 벌을 받은 건 농성자들 뿐이었다. 작전을 주도했던 김석기는 경찰총장이 된 데 이어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각종 의혹이 터져나오고 있지만 MB는 여전히 멀쩡하다. 그러니 용산의 엔드롤은 끝나지 않았다. 정당한 처벌을 포함한 진상 규명이 이뤄지고, 억울함과 지옥같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의 상처가 과연 치유가 되기는 할까. 그래도 이 세상에 희망은 아직 남아있다. 시간은 기억을 희석하겠지만 영화는 기억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