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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23. 2018

쇼의 미래-레이 카와쿠보의 오지 않은 시간에 관하여


Art of the In-Between. 지난 해 5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는 레이 카와쿠보의 여성복 150벌을 선보이며 이렇게 이름 지었다. 중간 지대, 여기와 저기 사이를 들여다보는 이 타이틀은 현실이 현실을 이탈하여 예술의 시간에 도달하는 순간을 암시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에릭 로메르, 홍상수,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지극히 아름답지만 찰나에 그치고 마는 순간들을 담아내며 영화를 예술에 안착시키듯 레이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에 패션을 데려다 놓으며 예술의 어느 순간과 마주한다. 재킷에 재킷을 얹어 확장하는 시공간의 재구성, 팬츠가 재킷을 만나 코트가 되거나 바지가 바지를 벗고 스커트를 입는 새로운 탄생, 그리고 무수히 많은 레이어와 입체의 축적으로 발생하는 기이한 차원. 1981년 파리 데뷔 쇼로 기존의 모든 것들에 반대(anti-establishment)를 외쳤듯 애초에 레이의 패션은 패션 그 이상이었다. 내게 미래는 여기가 아닌 어디, 지금이 아닌 언젠가고, 동시에 레이 카와쿠보다.  



꼼데갸르송의 도트는 무대의 일부가 되었다. 레이와 자주 작업했던 닉 나이트와 유르겐 텔러의 사진은 사각 프레임으로 또 다른 일부를 차지했다. 나는 그 옆에 기무라 이헤이 상을 수상한 모리 에이키의 이름을 쓰고 싶다. 모리가 지난 해 선보인 ‘Family Regained’는 모던과 포스트 모던을 지나 포스트 휴머니티로 향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이념, 생각을 빨갛게 색칠한 그의 사진에선 그 어떤 섹슈얼리티도 그저 하나의 사람으로 자리한다. 레이는 요지 야마모토와 함께 여성을 섹슈얼리티 기반 밖에 위치시켰던 디자이너다. 여기서 레이와 모리가 만난다. 레이의 패션엔 항상 Extra가 있었고, 모든 이념과 개념 너머는 beyond Human이다. 모리의 필터를 반영해 레이의 무대가 빨갛게 빛난다. 무대 위로는 물이 흐르고 그렇게 형성된 물결이 멜랑꼴리의 판타지를 싣고 온다. 이는 뷔욕의 것이기도 하고 피나 바우쉬가 눈을 감고 바라본 몸의 언어이기도 하다. 무대의 시작은 피나의 작품‘만월(Vollmond)’에서 가져왔다. 뷔욕의 앨범 ‘Utopia’의 ‘The Gate’가 시작된다. 몽환적인 목소리가 시간을 이탈하고, ‘지금’, ‘여기'를 벗어나 울려퍼진다. 독보적이고 그 어떤 것보다 앞서 있는 것. 레이와 뷔욕을 수사하는 말임과 동시에 미래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뷔욕은 레이를 ‘타인과 분리된 영역(Integrity)에서 고유한 자리를 지키고, 그렇게 용감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영역이 미래의 다른 말로 읽힌다.



지금의 쇼는 어떻게든 런웨이를 벗어나려 한다. 작년 가을 랄프 로렌은 자신의 차고에서 쇼를 펼쳤고, 마르지엘라는 아뜰리에에서 쇼를 열었으며, 알렉산더 왕은 뉴욕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상대로 쇼를 선보였다. 이는 곧 패션이 패션의 클리셰를 벗으려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언어와 로직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것을 은유한다. 무대를 감싼 아치 형태의 스크린에 피나의 춤 영상이 흐른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빨간 메이크업으로 가린 모델들은 워킹을 하지 않고 마치 무용수처럼 등장해 물결과 어울린다.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고 서로를 향해 셔터를 누른 뒤 다른 모델에게 전해준다. 워킹은 그렇게 발생한다. 훔쳐보기와 카피(Peeping & Copy) 조차 패션을 구성하는 요소가 됐음을 비꼬듯 은유한다. 남자 모델과 여자 모델이 뒤섞여 등장한다. 남성복과 여성복 역시 뒤섞인다. 남녀남녀도 여남여남도 아니다. 모델들은 퇴장하지 않는다. 그대로 머물러 차이를 연기한다.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 쇼와 일상이라는 차이, 그리고 현실과 예술이라는 차이. 무대 위를 흐르는 물이, 모리의 빨간 필터가 이 모든 차이를 지워낸다.



뷔욕이 ‘care for you’라 노래하는 대목에서 모델들이 흔들린다. 마치 바람이 나무를 스쳐가듯, 드뷔시의 ‘달빛’이 흐르는 기요시 영화에서 커튼이 흔들리듯, 그리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예감하듯. 이내 무대는 모델들로 가득찬다. 노래가 또 다른 뷔욕의 곡 ‘Blissing Me’으로 바뀌고 모델들이 조심스런 걸음으로 진열을 꾸린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사각형이다. 마치 피나의 작품을 모리의 프레임이 담아낸 사진같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맨 앞 가운데 모델을 비춘다. 우람한 팔 근육이 도드라진 상체와 곱게 떨어지는 원피스. 작년 레이의 콜렉션에서 선보여진 과도한 볼륨의 오버 재킷이 근육질 남자의 상체로 변주됐다. 음악이 사라지고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다. 남자와 여자가 떨어진다. 모델들의 얼굴을 비추는 빛만이 빨갛게 흘러간다 이것이 레이의 어느 미래의 콜렉션 마지막 착장이다. 차이가 혼재하는 모리의 세계, 무수히 많은 덧셈으로 복식을 외연으로 확장한 레이의 세계가 비탄의 끝에 스며나오는 뷔욕의 선율에 녹아든다. 레드로 수렴된 차이는 레이의 컬러 블랙 곁에 자리하고, 그렇게 패션은 사진이기도 하고 사진은 패션이기도 하며 그 어느 것도 춤이 될 수 있는 세계로 확장한다. 물이 흐르는 바닥에 조명이 글씨를 쓴다. ‘The Only Integ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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