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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Feb 26. 2018

올림픽은 누구도 홀로 두지 않는다

평창 올림픽이 남기고 간 것들


죄송합니다. 메달을 앞두고 김보름은 울먹이며 말했다. 잘못된 인터뷰 논란으로 나라가 시끄러웠을 때 그에게 남아있는 건 수많은 비난 만이 아니었다. 또 한 번의 경기를 치뤄야 한다는, 지독히도 잔인한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떠한 기분으로 시간을 버텼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틀 내내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뒤늦게 흘러나왔다. 사람이기 앞서 국가대표여야 하는 시간, 그러한 자리가 한없이 가냘프게 느껴졌다. 그는 선수로 링크에 나섰다. 선수로 시간을 살았다. 선수로 피니쉬 라인을 통과했다. 마음의 아픔, 후회와 잘못의 무게를 이겨낸 스토리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내게 보인 건 그런 판에 박힌, 미화하기 쉬운 말쑥한 감정이 아니었다. 태극기를 들기 앞서 얼음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은 국가대표도, 선수도 아닌 그저, 그냥 하나의 사람이고 싶은 이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구석에선 그녀의 선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올림픽은 그런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드라마, 우리 모두가 흘리는 눈물, 우리 모두가 느끼는 슬픈 기쁨을 그려낸 17일이 끝이 났다.  



평창 올림픽이 성공적이라 말한다. 보다 다양한 종목에서 보다 많은 메달을 땄고 보다 많은 외신의 칭찬을 받고 적자가 아닌 흑자를 기대할 수 있어 성공적이라 말한다. 정말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내게 올림픽은 메달 경쟁이나, 숫자의 향연이 아니다. 언제나 혼자가 아닌 함께의 드라마고, 홀로 흘리는 눈물이 아닌 닦아주는 눈물의 드라마다. 일본 여자 컬링 팀의 신문 기사를 보다 후지와라 사츠키가 한 말에 가슴이 울컥였다. '싸우고 있다면 실패가 아니에요. 포기하는 순간 실패가 되는 거죠(戦っていてるのであれば失敗ではありません。諦めた瞬間、失敗になるものですよ). 이렇게 생각하기까지의 시간이 떠올랐다. 가늠할 수 없는 아픔과 고난이 떠올랐다. 올림픽은 우리는 모두 하나 이상의 드라마를 품고있고, 그만큼의 실패와 아픔을 이겨냈다는 소중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도 전세계로 생중계하면서 말이다. '같이 할래?'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은빛 스토리, 배추 밭에서 연습하는 아들, 스노보더 이상호를 보며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다는 아빠, 부상 이후 4회전 점프 연습을 다시 시작한 지 2주 만에 보여준 피겨 하뉴 유즈르의 317점짜리 연기와 7번의 수술을 이겨내고 거머쥔 임효준의 금빛 메달, 그리고 올림픽 출전을 위해 귀화를 선택한 수 많은 선수들의 고뇌. 그 어떤 고독한 눈물도 올림픽은 홀로 두지 않는다.

운동 선수들을 보면, 특히나 올림픽에서의 그들을 보면 부럽다는 마음을 갖는다. 자신이 겪은 아픔, 자신이 이겨낸 고통, 자신이 이뤄낸 어떤 성과를 세계를 무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복 받은 일인지 그저 부럽기만 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아픔, 고통, 성과를 함께 할 수 있는 것 역시 얼마나 복 반은 일인가 생각한다.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올림픽 최선의 가치는 아마도 공감이었고, 앞으로도 공감일 것이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쇼트트랙 정재원 선수는 팀을 위해 자신의 플레이를 희생했다. 팀 종목이 아닌 개인 종목에서 '팀을 위한 희생'이란 대체 무엇을 애기하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쇼트트랙 내의 파벌 문제, 러시아의 도핑 의혹, 올림픽에 잡음이 없는 건 아니다. 예선, 준결승 등 이전의 경기가 그저 결승을 위한 디딤돌로만 기능하는, 하나의 온전한 경기로 완성되지 못하는 매스 스타트는 사실 무리수를 느낀다. 맹목적인 애국의 이벤트라는 냉소적인 시선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올림픽의 소중함을 믿는다. 이 지독히 현실적인 잡음 곁에, 인간이기에 가능한 순간, 그 어떤 아픔도 언젠가 구원될 수 있다는 희미한 희망을 보여준다.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에게 다가가 포옹을 한 고다이라 나오의 모습은 분명 멋진 화합의 장면이었지만 그보다 그저 한 사람의 고된 시간을 위로하는 누군가의 따뜻함이었다. 단순한 공감이 아닌 내일을 건네는 공감. 올림픽은 여전히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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