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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16. 2018

사랑의 잔해 ナラタージュ

'나라타쥬'는 차고, 시리며, 동시에 뜨겁고, 질퍽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사랑은 꼬리를 드러낸다. 사랑에 아름다운 시작은 있지만, 그러한 결말은 없고 무너져내린 마음의 잔해는 황량한 해변을 나뒹군다. 사랑의 마지막은 어쩌면 이러한 시간이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서른 여섯의 젊은 소설가 시마모토 리오의 소설을 원작으로 가져온 영화 '나라타쥬'는 사랑의 마지막, 쓸려간 사랑, 사랑의 잔해를 응시한 작품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우충충한 무드는 날씨 이상의 의미를 갖고, 영화 곳곳엔 부서져버린 마음의 조각이 흩어져있다. 사이렌 소리에 욕지기를 느끼는 하야마 선생(마츠모토 쥰)이나 돌연 풀에 뛰어드는 쿠도(아리무라 카스미), 그리고 시작이 곧 마지막이 되어버린 오노(사카구치 켄타로)의 외로운 구두는 시작은 있지만 끝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니까 황폐해진 시간의 덩어리가 묵직하게 남아있는 사랑의 마지막을 은유하는 메타포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남아있고, 애달프게도 그건 고된 아픔과 상처의 시간이다. '나라타쥬'가 얘기하는 건 화사한 사랑의 환상이 아니다. 유키사다 이사오는 사랑이 남긴 침울하고 출구 없는 잔해의 늪을 바라본다. 마지막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도'와 '아직'으로 나뉜다면 '나라타주'는 '아직도'를 택했다. 속절없는 질곡으로 흐르는 서사. '나라타쥬'는 차고, 시리며, 동시에 뜨겁고, 질퍽하다. 이런 멜로를 본 적이 없다.  


지난 해 10월 일본에서 공개된 '나라타쥬'는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렸다. 사제간의 사랑, 삼각관계의 서사 등 선이 분명한 골자를 하고 있지만 뚜렷한 맺음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는 '확실하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는 연애의 반복일 뿐'이라는 비판을 샀다. 확실히 하야마가 결국 아내에게로 돌아가고, 그럼에도 쿠도와 마지막 밤을 함께하거나 하야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않은 채 오노와 연애를 시작하는 쿠도의 이야기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한 대목일지 모른다. 하지만 유키사다 감독의 의도는 애초 그런 물리적인 사랑이 아니다. 신경질적인 아내와의 파탄 이후 하야마의 시간은 변함없이(相変わらず) 무너져내린 사랑의 잔해 속에 있었고, 그런 하야마를 바라보는 쿠도의 마음 역시 짙은 그늘 속에 있었다.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비춰지는 오노 또한 그늘을 품은 상대를 바라봐야 하는 절뚝거리는 사랑의 불구자다. 변함없이(相変わらず), 무심히 서너 번 등장하는 이 대사는 어쩌면 영화의 보이지 않는 시간일지 모르겠다. 영화 초반 비 내리는 저녁, 쿠도는 사무실 창가에서 회중 시계를 꺼내본다. 하야마의 아빠가 하야마에게 남겨 다시 쿠도에게 건네진 시계. 하야마와의 마지막 밤 이후 태엽을 갑지 않아 여전히 그와의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시계. '相'変わらず가 ’愛'変わらず로 보인다.

아내의 방화와 가출 이후 내려간 시골, 거기에 너가 있었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겉돌던 시간, 거기에 당신이 있었다. 영화의 미묘하고 복잡한, 그래서 안개에 싸인 듯한 감정의 행적을 설명하는 건 영화 후반 하야마가 내뱉는 이 대사다. 영화는 사랑의 잔해 속 격정에 허우적대는 남녀의 시간을 그린다. 사랑이란 이름조차 얻지 못한 감정의 처량맞고 구슬프며 한없이 질퍽이는 순간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유키사다 이사오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정반대의 무드로 화면을 감정으로 채워 넣는다. 아직 남아있는 흔적, 그런 자리, 거기에 흐르는 시간이 농밀한 밀도로 전해진다. 사랑이 남긴 쓰디 쓴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시간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 그리고 둘의 물에 홀딱 젖어 시리도록 아파오는 시간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꺼내보려 애쓰는 또 한 명의 남자. 사랑 곁에 있지만 그저 방황하기만 할 뿐 결코 머물지 못하는 마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이 되어야 할까. 등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세 남녀의 시간은 곧 사랑이 되지 못한, 사랑에 휘둘리는, 지독한 늪에 빠져버린 가냘픈 마음의 뒷모습이다. 지나간 일을 회고한다는 의미의 제목, '나라타쥬',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쿠도의 꿈에 담아버린 형식. 유키사다 이사오는 어쩌면 지금 무너져내린 사랑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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