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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02. 2018

아프니까 살고싶다

고작 백엔 짜리 희망, '백엔의 사랑'


삶이 아픈 건 어쩌면 자신이 밉기 때문이다. 아침이 의미를 잃고, 아무런 위안도 머무르지 못하는 시간에 남아있는 건 그저 밉고 미운 자기 자신 하나 뿐이다. 내일은 하염없고,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사람은 누군가를 원망할 의지도 잃고만다. 안도 사쿠라가 주연한 영화 '백엔의 사랑'은 감독 타케 마사하루가 마지막임을 각오하고 만든 작품이다. 극중 이치코의 출렁이는 뱃살과 자랄대로 자라버린 헝클어진 머리칼이 타케 감독의 힘들었던 시간 그대로를 반영하는 건 아니지만, ‘백엔의 사랑’은 어찌할 수 없는 시간, 그 벼랑 끝에 서있다. 이치코(안도 사쿠라)의 하루는 좀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조카와 게임을 하다 동생에게 타박받고, 아침부터 싸움에 목소리를 높이며, 왜인지 조카에게 조금의 호신술 같은 걸 가르친다. 서른이 다 되어 부모 집에 더부살이하는 이치코는 밥벌이도 못하는 소위 N포 세대의 한 명이겠만, 시간이 멈춰버린 이에게 그런 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타케 감독은 시나리오 완성을 코앞에 두고 밥벌이를 하러 해외로 떠났다. 영화는 함께 작업한 아다치 신이 마무리했다. 영화엔 그런 애절함, 간절함, 포기가 남기고 간 작은 희망같은 게 담겨있다. 고작 백엔, 천 원 짜리 동전의 희망이 남아있다. 아마도 꽤 오랜만에 나선 동네, 왜인지 마주하게 된 체육관의 복서, 그가 흘린 동전 하나와 어쩌다 그녀에게 굴러온 백엔. 이치코는 링 위에 선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백엔의 사랑'은 초라하다. 어찌보면 이치코에게 다가온 남자 카노(아라이 히로후미)가 그녀의 내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마지막 시합을 앞두고 있는 그저그런 복서다.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없듯, 이치코의 삶이 고작 백엔으로 돌변하지는 않는다. 고작 편의점 심야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고작 뱃살을 출렁이며 줄넘기를 하고, 고작 허름한 체육관에서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영화는 애초에 전형적인 서사의 반듯한 길을 갈 생각이 조금도 없다. 어둡고, 모나고, 울퉁불퉁한 길을, 아침이 아닌 밤, 하지만 어김없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길로 이어간다. 집을 나선 이치코에게 다가오는 건 편의점 아저씨 직원의 폭력에 가까운 수작이고, 이치코의 주먹은 그의 무자비한 폭력을 이겨내지 못한다. 데이트라면 데이트를 하러 가는 날에도 이치코와 카노 사이엔 연인간의 설레임이 흐르지 못한다. 아직 낫지 않은 상처와 또 하나의 상처가 그저 같은 길을, 서로 거리를 둔 채 걸을 뿐이다. 마지막 시합에서 져버린 카노와, 그의 어둠에 기대는 이치코. 이치코가 눈물을 흘리는 건 카노가 두부 장사 여자와 함께 떠나갔을 때가 아니고, 피투성이가 된 카노에게 자신의 품을 내워주던 때다. 영화는 밤에서 보이는 다음을 걸어간다.

영화의 줄거리는 심플하다. 대학까지 나와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여자가 왜인지 글로브를 끼고, 왜인지 링 위에 올라, 왜인지 지금껏 보지도 못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현실을 잊은 비약, 희망에 매달리지 않는 오기, 왜인지에 담긴 애절함이 영화를 끌고간다. 이치코에게 삶을 느끼게 해주는 건 밤마다 찾아와 버려지기 직전 음식을 몰래 가져가는 노숙자 아주머니이고, 강간을 당하고도 다시 좌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카노와 함께 했던 밤의 기억들 덕택이다. 영화는 희망을 구걸하지 않는다. 위로를 동냥하지 않는다. 영화가 그리는 건 어둠을 살아온 사람의 애절함이고, 아침을 보지 못한 이의 간절함이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의 어둠을 마주했을 때의 포근함, 아주 작은 안도가 영화에 애잔하게 스며있다. 엔딩과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 수도 없이 울려퍼지는 외침, '아프다'와 '살고 싶다'의 반복. 일본어로 아프다는 이타이(いたい)과, 살고싶다는 이키타이(いきたい)다. 이치코는 어렵사리 올라간 데뷔전 링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타케 마사하루의 차기작 '링 사이드 스토리'가 완성된 건 3년이나 흘러서다. 삶이 아프다는 건 그만큼 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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