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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27. 2018

진심이 구원한 삶, 레이디 버드

엄마도, 딸도, 우리도 모두 완전하지 않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본명 크리스틴 대신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를 싫어하고, 사사건건 비난을 늘어놓는 엄마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서부의 외딴 마을 새크라멘토의 성모 학교 입학을 강요하고, 뉴욕은 커녕 햄프셔로의 독립도 반대하는 엄마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 낭독 파일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고등학교 무도회 용 원피스를 고르기 위해 함께 마트를 둘러보며,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둘러앉아 선물을 주고받는 것 역시 엄마다. 밉지만 좋아하고, 좋아하지만 미운 게 크리스틴의 엄마고, 우리의 엄마며, 곧 우리 자신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레이디 버드'는 새가 되고 싶은 크리스틴이 서툰 날개짓을 통해 삶의 진심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엄마와의 불화, 지방 소도시에 대한 불만으로 흘러가는 작품이지만 그레타 거윅은 결코 화해나 진부한 성장 스토리로 이야기를 풀지 않는다. 영화가 마주하는 건 우리가 놓친 진심의 순간들이고, 그렇게 흘러가는 삶의 애달픔이며, 그럼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의 시간이다. '레이디 버드'는 비상하지 못한 새가 마주한 도약의 세상을 펼친다. '중요한 건 옳고 옳지 않은 게 아니라 진심이다.'  

영화는 다소 코믹하게 흘러간다.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의 삶은 그저 모든 게 불만 투성이인 새크라멘토를 지워내기 위해 흘러간다. 단짝 친구 줄리와의 관계는 그가 유일하게 온전한 레이디 버드로 자리할 수 있는 자리고, 학교까지 차로 배웅하는 아빠의 친절에도 부러 한참 떨어진 곳에 내려 걸어가는 건 크리스틴의 삶을 숨기려는 안간힘이다. 영화엔 이렇게 레이디 버드가 되지 못한 크리스틴의 애달픔이 곳곳에 숨어있다. 연극 오디션에서 한눈에 반한 대니를 마트에서 마주해 '어디 사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레이디 버드는 화제를 성급히 돌려버린다. 레이디 버드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크리스틴인 새크라멘토 소녀의 현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레이디 버드의 눈물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발랄함과 생기를 십분 활용해 영화를 쾌할하게 끌고간다. 주임 수녀에 대한 반항으로 정학을 받고도 무덤덤하게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남자 친구 대니가 클럽에서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도 그저 벽에 쓰여진 대니의 이름에 엑스자를 그을 뿐이다. 대니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 속여 위기를 맞이하는 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는 어디까지 레이디 버드의 시간을 도와주려 애쓴다. 레이디 버드의 진심이, 그녀의 가녀린 진심이 그렇게 한다.

유쾌하고 코믹하게 흘러가는 영화이지만 영화엔 죽음이란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 레이디 버드의 두 번째 남자친구 카일은 아빠가 말기 암환자라 어차피 죽을 거라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같은 반 친구 제나는 고모의 죽음을 자살이었다며 가볍게 얘기한다. 눈물을 흘리고, 침묵에 잠겨야 하는 순간을 영화는 그저 일상의 별 다를 거 없는 순간으로 흘려보낸다. 세상엔 아픔을 간직하며 보내는 시간도 있지만 그에 매몰되지 않고 그저 다음을 살아가는 시간도 있다. '레이디 버드'는 후자의 시간을 산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진심이 묻어난 순간이고, 그렇게 바라본 세상이다. 클럽에서의 난처한 키스 장면 이후, 대니와 레이디 버드는 한참을 두고 재회한다. 보수적인 도시, 카톨릭계 가정에서 자란 대니는 그저 자신의 성정체성이 알려질까 겁이 나고, 대니와 함께 하늘의 별을 찾아 이름을 달아주었던 레이디 버드는 배신당한 마음에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영화는 둘의 눈물과 따뜻한 포옹을 보여준다. 화해할 수 없지만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이고 진심의 시간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이 아름다운 순간이 '레이디 버드'의 날지 못하는 날개짓을 가능하게 한다. 잊고 살았던, 잊으려 애썼던 크리스틴의 시간이 흘러간다.

뉴욕으로 떠나고자 했던 크리스틴의 바람은 이뤄진다. 엄마에겐 비밀로 해 여전히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공항으로 향하는 차를 운전하는 건 레이디 버드의 엄마, 매리언이다. 그는 주차비가 비싸다며 딸을 외면하지만 끝내 차를 유턴해 떠나간 딸의 적적한 자리를 바라본다. 뉴욕에 도착해 엄마가 쓰다 찢고, 또 쓰다 찢은 편지와 마주한 레이디 버드는 왜인지 성당에 들르고, 거리를 걸으며 지나간, 새크라멘토에서의 시간을 회상한다. 그녀는 전화를 걸어 레이디 버드가 아닌 '크리스틴이에요'라고 말한다. 잊으려 애썼고, 잊고 싶었던 시간이 이제야 그녀에게 다가와 앉는다. 이 장면은 딸을 외면했던 매리언이 방향을 돌려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장면과 함께 영화에서 울림이 가장 큰 대목이다. '잊고나서야 알아챈다'랄지, '떠나보니 알게된다'랄지, '그래도 딸이니까', 그래도 엄마니까'라는 구태의연한 결말 대신 '레이디 버드'는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시간의 진심어린 순간을 제시한다. 레이디 버드는 매리언에게 옳지 않을 수 있다. 매리언 역시 레이디 버드에게 옳지 않을 수 있다. 엄마도, 딸도, 우리도 모두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둘 사이엔 어김없이 진심의 순간이 차곡히 쌓여있고, 영화는 끝내 그 순간과 마주한다. 크리스틴은 이제야 하늘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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