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Apr 18. 2018

불행을 위한 엘레지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불행에 찾아오는 봄날의 힘겨운 기적


불행은 왜 불행을 더 불행하게 할까. 불행은 왜 불행을 찾아올까. 불행은 왜 불행한 사람에게만 다가와 불행을 궁지로 몰아갈까. 그러니까 단 한자 차이임에도 불행과 행운은 왜 그리 요연할까. 호랑이가 탈출한 날 경유는 뜻하지 않게 나그네 신세가 된다. 함께 살던 여자 현지는 몰래 이사를 가고, 불려간 대리 운전 손님들을 하나같이 진상이다. 그나마 갈곳이라곤 친구 집이 유일하지만 그 역시 곧 결혼해 경유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이광국 감독이 연출한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은 미안함을 미안하게 하는 영화다. 주인공 경유는 수도없이 미안한 상황에 놓이고, 그만큼의 '미안해'란 말을 뱉게되지만, 그의 잘못은 그가 불행하다는 것 외에 달리 없다. 그는 미안하지 않지만 미안하다 말한다. 심지어 (아마도) 함께 사랑했고, 함께 얘기하며 글을 썼고, 그렇게 봄날의 시간을 보냈던 친구 유정은 풀리지 않는 단편의 실마리를 위해 경유가 발표하지 못한 소설 '나그네'를 달라고 부탁한다. 잊고 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한마디이지만 경유에겐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부탁이다. 보고있는 내내 화가 났고, 경유가, 이진욱이 이렇게까지 불행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영화의 의도가 의심되기도 했지만 보고있는 관객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경유에게 미안함을 표하는 것 뿐이다. 호랑이가 탈출했다.  



이진욱과 고현정의 따뜻한 겨울의 사랑 얘기를 생각했지만 예상은 180도 틀렸다. 영화는 둘의 사랑, 감정, 교감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매달리는 건 불행에 찾아오는 봄날의 힘겨운 기적에 가깝다. 글 쓰기를 포기한 대리운전 기사의 이야기란 점에서 영화의 암울한 무드는 어쩌면 예견됐던 건지 모른다. 영화는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그러니까 실패와 좌절로 가득찬 시간으로 흘러간다. 초반부터 경유와 현지의 대화는 어긋나고 경유는 현지의 부모를 피해 고단한 언덕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온다. 잠시 멈춰 트렁크에 앉아 한숨을 돌리지만 그에겐 담배조차 없다. 경유는 얼마 전 담배를 끊었다. 할 수 없이 찾아간 친구에겐 '븅신'이라 타박받고, 햄버거 가게 면접에선 '면허증 외엔 아무것도 없네요'라는 비난보다 치명적인 현실 공격을 받는다. 하필 대리 운전을 부른 손님이 함께 소설을 썼지만 먼저 등당한 유정인 건 도망갈 곳이 어디에도 없는 경유의 처지를 압축한다.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탓으로 매워진 어둠의 나날은 출구 없는 밤에 가깝다. 호랑이의 동물원 탈출 이후 간간히 들려오는 '으르렁' 소리보다 경유의 나날은 더 공포스럽다. 경유는 매일같이 밤을 산다.



영화가 경유와 유정의 얘기인 건 사실이다. 영화는 경유에겐 아픔이기만 한 유정의 현재에 비치는 햇살의 그림자도 아우른다. 써지지 않는 글을 신경질적으로 지워내고, 밥보다 소주를 더 많이 들이키며 마감이 밀려 블랙리스트 근처에 서있는 것 역시 유정이다. 어디에도 도망갈 곳 없는 이들의 칠흙같은 시간이 영화를 움직인다. 최근 들어 머물 자리(居場所) 만큼 도망갈 자리(逃げ場) 또한 필요한 것이 삶이란 생각을 자주 하곤 하는데 영화는 이들의 도망칠 곳 없는 나날을 고통스러울 만큼 지난하게 반복한다. 경유는 대리비를 떼이고, 폭행까지 당하며 유정은 수상한 소설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 하지만 영화는 거의 종반에 이르러 기지개를 켠다. 수상해 보이던 손님의 사고 이후 드러난 그의 얼룩진 시간이 경유 곁에 다가오자 영화는 비로서 내일을 일으킨다. 어둠에 빛을 비춰 찾아낸 내일이 아닌 아파도, 불행해도 어쩌면 괜찮을지 모른다는 보다 현실적인, 조금은 뭉툭한 위로의 내일이다. 경유는 다시 노트와 펜을 사고, 담배를 물고 글을 써내려간다. 뒤이어 이어지는 다소 판타지한 장면은 집을 나선 경유를 다시 그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시간이다. 떠났지만 남아있는 경유의 수트 케이스와 경유의 지친 시간에 누군가의 상처가 더해지는 판타지한 순간. 경유가 돌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아있는 여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