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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27. 2018

지금도 아니고, 그 때도 아니다
클레어의 카메라

김민희는 홍상수 영화에 전환이 되었다


세상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한 뼘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 그렇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나무, 바다를 부유하는 부표 하나, 그리고 그저 '큰 거'라고밖에 지칭할 수 없는 무언가와 그렇게 연결되는 카페 앞의 커다란 개. 홍상수 감독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를 보았다. 영화는 사무실 안 무언가를 적고있는 만희의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언어가 아닌 감각, 산문이 아닌 시, 장면보다 그 안에 담긴 섬세한 기운으로 흘러가는 시간은 여전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촐하다. 영화 수입 회사에서 일하는 만희가 출장 중 돌연 해고 통보를 받고 벌어지는 일의 조각들이 전부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줄거리가 중요했던 적은 없고, 언제나 줄거리 사이사이의 교차와 어긋남, 이야기 조각조각의 부딪힘과 진동,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 너머를 응시하는 예민한 시선이 영화를 움직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번에도 여전해 영화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무엇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수상했던 검정색 남자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지는 '클레어'란 인물이 등장하고, 장소는 프랑스 깐느, 계절은 여름, 들려오는 건 비발디 '사계' 중 '겨울'이다. 그렇게 이상한 시간. 클레어가 사진을 찍는다.   


오프닝의 만희, 김민희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고개를 숙이고 하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은 어딘가 숭고하고 진실되 보이기까지 한다. '아름답다.' 영화는 이 말을 수도없이 많이 한다. 만희의 회사와 함께 깐느를 찾은 소 감독이 프랑스어로 쓰인 시집을 보고 '아릅답다' 말하고, 카페 앞에서 낮잠이 든 커다란 개를 보며, 만희도, 클레어도 아름답다 말한다.  그리고 소 감독과 클레어가 만희에게 '아름답다'를 연발한다. 깐느에 흐르는 이 '아름답다'는 말은 홍상수 감독이 지금껏 그려왔던 진실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있는 듯 느껴지고, 종내 그것이 어쩌면 만희, 김민희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게한다. 그녀가 갑작스레 짤린 이유는 '순수하기 때문이고', 그녀의 상사 양혜는 그녀가 '부정직'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판단한다. '판단'과 '정직', 그리고 그와 정반대 편의 '순수.' 양혜는 해고의 모든 이유를 말했다고 하지만 만희는 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생각과 말들. 남아있는 건 '순수'와 '아름다움.'. 깐느의 여름에 비발디의 '겨울'이 흐르고, 아름다움은 벼랑 끝에 매달려 애처롭게 흔들린다. 만희는 그저 편하게 누워있는 개를 쓰다듬는다.


어느 시점부터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극단적인 줌업과 아웃을 자주 사용했다.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방법은 어느새 홍상수 영화의 인장이 되었는데 '클레어의 카메라'에선 그 이유의 실마리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친구의 영화 상영 초대로 깐느를 찾은 프랑스인 클레어는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을 찍어댄다. 그녀는 사진을 찍으면 그 대상은 이전과 달라진다고 말하고, 영화의 후반부 만희와의 자리에선 '오래,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만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얘기한다.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이 차이를 통해 영화 속에 자리한다. 양혜와 소 감독은 모르는,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차이이고, 현실 이면, 그 너머에 자리하는 차이이다. 둘은 클레어와의 자리에서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소 감독이 할 수 있는 말은 '엉망이 됐어'라는 것 뿐이다. 영화는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쫓으려 무단히 애를 쓴다. 그의 영화가 늘 그랬던 것처럼 '클레어의 카메라' 역시 그렇게 삶의 파편에 집중한다. 그간 홍상수 영화에서 보였던 반복의 징후는 실은 차이를 향하고 있었음이 명확해진다. 어딘가 이곳의 사람이 아닌것처럼 느껴지는 클레어는 음악을 가르치는 시인이고, '아름답다'는 말만큼 그녀가 자주 내뱉는 단어는 '이상하다'다. 

홍상수 영화에서 시간이 뒤섞인, 아니 홍상수 영화가 시간을 무화한 건 이제 별 다른 얘기도 아니지만 '클레어의 카메라'엔 유독 이상한 장면이 하나 있다. 이미 친해졌을 게 분명한 클레어와 만희가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마주쳐 눈물을 흘리고 사과를 건네는 대목이다. 클레어가 이상하다 말했고, 소 감독, 만희가 동의했던 이름모를 프랑스 시와 호텔의 벽화보다 이 대목은 더욱 이상하게 다가온다. 순수함은 부정직하다 오해를 받았고, 그렇게 칸느에서 부유하게 된 만희가 소 감독의 (역시나) 이상한 질책을 듣고 눈물을 떨굴 때, 어떤 진심, 보이지 않지만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흐느끼고 있다는 기분이 몰려온다. 어느새 클레어가 다가와 사진을 찍고, 만희는 울먹이며 얘기한다. 'Don't take picture.' 사진을 거부한 유일한 장면이고, 차이가 빚어낸 무언가가 고개를 내민 장면이며, 그래서 매우 위태로운 장면이다. 동시에 그동안 알 수 없는 모형('생활의 발견')이거나 남산타워('극장전') 등으로 암시되기만 했던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가 만희로, 한 여자로 발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홍상수 영화에서 김민희는 분명 어떤 전환을 제시했다. 

영화는 모두 만희로 시작해 만희로 끝난다. 싸구려 항공권 탓에 며칠이나 지나 짐을 싸는 만희는 동료들의 도움을 모두 거절한다. 박스를 정리하고, 테이프를 붙이고, 물건을 정리하는 만희의 모습은 결연해서 아름답다. 클레어와 함께 찾은, 해고 통보를 받은 카페에서 그녀는 며칠 전 시간을 마주하지만 그건 결코 같은 시간이 아니고, 자신의 집 테이블에서 그녀는 연한 분홍빛의 헝겊을 잘라내며 '사는 게 너무 싫다, 세상이 너무 싫다'고 말한다. 맞은 편의 클레어는 '같은 말이네요'라 말하며 헝겊을 가슴과 손에 대어본다. 어쩌면 세상은 삐뚤게 잘라진 헝겊 조각일지 모른다. 만희와 소 감독의 제자가 만나 대화를 나누며 들려왔던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요'의 뿌연 시간일지 모른다. 술을 연거푸 들이키고 소 감독이 내뱉은 '엉망이 되었어'의 상황일지 모르고, 클레어가 바다를 걷다 향했던 보이지 않는 어둠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 때도 아닐지 모른다. 의미도 모르는 프랑스 시를 클레어를 따라 애써 읽어볼 때 홍상수 영화는 현실에 틈을 빚어낸다.  칸느의 여름, 비발디의 '겨율'이 들려왔고, 벼랑 끝에 몰렸던 만희는 차이와 차이 사이에서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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