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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n 04. 2018

유아인의 얼굴이 말하는 것

줄탁동시의 시간, '버닝'


찌는 듯한 도심의 여름 한복판, 트럭 뒤로 담배 연기가 일렁인다. 148분에 이르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시작하는 건 일렁이다 아련하게 사라지는 담배 연기다. 화물 배달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종수는 알 수 없는 세상을 산다. 아빠는 공무 집행 방해죄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고, 남편의 폭력을 못이겨 집을 떠난 엄마는 무소식이며, 쓰고있는 소설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현실의 부조리가 그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상태. 출구 없는 청춘의 일상을 예상하지만 영화는 일찌감치 방향을 튼다. 트럭 너머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새 한 무리가 날개짓을 하며 보이는 세계, 아지랑이가 그려내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의 세계를 응시하고, 영화는 그 수수께기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종수의 얼굴로 진행된다. 85. 아마도 이 숫자가 시작일 것이다. 종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물을 싣고 길을 걷다 나레이터 모델에 이끌려 공 하나를 건네 받는다. 이 공은 종수에게 분홍빛 손목시계를 선물하는데 여기서부터 종수의 삶은 균열을 일으킨다. 나레이터 모델은 자신을 소꿉친구 혜미라 소개하고, 그녀의 집에서 섹스를 하며 바라본 곳엔 존재하지 않는 벽이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현실의 틈을 치고 들어오는 이면의 순간은 이창동 영화에서 이렇게 발현한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모태로 했다. 트랙을 벗어난 시간과 그렇게 드러나는 이질적인 순간, 귤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고, 고양이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혜미는 수수께끼같은 여자다. 그녀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고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지 모른다. 종수와 처음 만난 날 술자리에서 그녀는 귤을 먹는 팬토마임을 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은유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혜미의 집을 방문한 종수는 이상하리만치 이 문장을 그대로 응용한다. 고양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는 것이다. 현실의 물리적인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차원과 다른 시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문장이다. 종수의 삶을 헝크러트리는 건 이렇게 무시무시하고 치명적인 '어쩌면'의 세계다. 이후 종수는 아빠가 혼자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수상한 징조들과 마주한다. 수화기를 들려는 순간 끊어지는 벨소리, 그렇게 반복되는 아찔함,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 울음 소리와 모두의 기억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우물.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 혜미는 의문의 남자 벤과 함께 돌아오는데 포르셰와 구닥다리 트럭으로 대조되듯 종수와는 정반대편의 삶을 사는 남자다. 하지만 영화는 벤을 단지 현실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장치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집중하는 건 그러한 상황과 마주한 종수의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종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단순히 분함이나 열등감을 넘어선 기이한 감정이 스크린을 팽창한다.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며 비닐하우스를 주기적으로 태우고, 이는 빗물에 쓸려가는 집들과 같다고 얘기하는 벤의 말은 팬토마임이 은유하는 '제로'의 세계와도 유사하다. '버닝'은 시작과 끝이 아닌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묘한 영화다. 



영화는 초반부에 이미 많은 걸 설명한다. 귤을 이용한 팬토마임에서 시작해 현실에서의 배고픈 사람인 '리틀 헝거'와 보다 높은 차원에서 배고픈 사람인 '그레이트 헝거'를 얘기하는 대목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모두 혜미의 입을 통해서고 그만큼 현실에 수렴되지 못하는 세계다. 거칠게 말하면 영화는 '리틀 헝거'의 물질 세계 안에 '그레이트 헝거'의 관념 세계 흔적을 드러내며 끌고가는 영화다. 그 안에 종수가 있고, 그와 함께 남겨진 송아지 한 마리가 있으며, 뒤틀린 기억과 혼재된 세계의 소멸과 탄생이 있다. 당연히 충돌과 부닥힘이 가득한 축적이고 그렇게 불안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 불안과 불안정함은 종수를, 나아가 유아인을 설명한다. 유아인은 얼마 전 모 잡지 인터뷰에서 '줄탁동시'란 말을 꺼냈는데 '버닝'이 딱 그렇다. 모두 타 없어질지 모르는 비닐하우스를 지키기 위해 마을을 전력으로 질주하고, 돌연 사라진 혜미를 찾기 위해 애쓰며, 영문을 알 수 없던 고양이 보일이를 잡기 위해 조심스레 다가가는 모습은 쓸 수 없었던 소설의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가려는 몸부림이고 동시에 비로소 현실 너머의 세계를 마주하려는 울퉁불퉁한 용기다. 초점 없이 화면을 응시하는 날 것 그 자체의 얼굴이 많은 걸 얘기한다. 전화 벨이 끊길까 달려가 수화기를 향해 달려가는 종수의 몸짓은 현실에 내비친 빛의 자락을 헤아리는 섬세함만큼 치열하게 현실을 뒤흔든다. 홀로 남겨진 송아지를 보내버리는 순간 어쩌면 종수는 자신만의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남산 타워 전망대 유리창에 비친 빛이 스며드는 북향 쪽방의 단 30초 정도 시간. '버닝'은 그 찰나의 영화다. 현실과의 괴리감이 묻어나는 요소들이 '버닝'을 구성햔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응축된 나레이터 모델이란 직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이고, 트럭 뒤로 새어나오는 담배 연기는 노동의 피로 이상의 의미를 풍긴다.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난 엄마 역시 수수께끼같은 전화 벨과 함께 의뭉스런 존재로 남고, 혜미가 빠져 반나절을 울었다는 우물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어쩌면 우물도 아닌 무엇일지 모른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 울음을 닮은 소리와 혜미가 배워왔다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사위,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서 반복되는 벤의 심드렁한 하품과 어떤 영문인지 전혀 다른 나레이터 모델 손목에 차여있는 분홍빛 손목 시계 사이를 종수는 달린다. 혜미가 사라진 방에 돌아와 종수가 글을 써내려가는 건 찰나의 빛이 어른거리는 창가고, 카메라는 그런 종수의 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알의 껍질을 향해 약동하는 '리틀 헝거'의 시간. 그렇게 깨어지는 알의 껍질, 정작 불타는 건 벤의 비닐하우스가 아닌 종수가 불을 지른 벤과 벤의 차 포르쉐. 어쩌면 애초에 귤은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고양이는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부정이 부정되고 부재가 망각되는 시간. 시작도 끝도 의미를 잃은 세계를 향해 종수는 달린다. 불 타고 남는 건 아무 것도 없고, 실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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