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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Sep 01. 2018

'서치'와 '휘트니', '휘트니'와 '서치'

그럼에도 나는 '서치'가 아닌 '휘트니'를 떠올린다.


영화 '서치'는 어쩌면 끝이 없는 미로 이야기다. 영화 '휘트니'는 어쩌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 미아 이야기다. 물론 둘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저 나는 '서치'를 보고 이틀 후 '휘트니'를 보았을 뿐이다. 어김없이 개인적인 이야기, 나는 그저 오늘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 딸의 실종을 둘러싼 아빠의 애절함을 온갖 SNS와 컴퓨터 화면으로 끌고가는 '서치'에서 유일하게 내게 울림을 준 건 선뜻 쓰지 못해 화면 바닥에서 꿈틀대는, 채워지지 못한 말풍선이었다. 영화에서 만든 이의 의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일 때, 나는 왜인지 그 영화가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드랙(drag)과 카피, 그리고 페이스트의 무수한 반복 속에 영화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사실 '서치'는 꽤 그럴싸한 아이디어였을지 모른다. 모두가 친구이지만 친구가 아니고, 잃어버린 딸은 찾아도 찾을 수 없고, 비밀번호로 굳게 잠긴 각자의 세계는 안타깝게도 현실에 대한 냉소 섞인 풍자다. 하지만 영화에서 나는 그 아이러니를, 딜레마를, 모순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아내와 딸을 잃은 아빠의 애절함의 길목엔 어김없이 컴퓨터 화면과 SNS 창이 스쳐갔고, 관객에거, 최소한 나에겐 꽤나 거슬리는 장애물이었다. 유치함, 진부함, 아마츄어리즘, 감독의 과욕. 이렇게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서치'는 부모와 아이, 그리고 SNS 시대의 아이러니를 실종 사건으로 그럴싸하게 풀어낸 말끔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네이버 평점은 9를 넘고, 로튼토마토는 70% 수준이다. 숫자를 보고 나는 꽤나 놀라버렸지만, 그저 '어쩌면'이란 머릿말을 붙이고 고개를 돌리고 만다. 어쩌면 '서치'는 내게 영화가 아니다. 

'휘트니'는 사실 '서치'와 닮은 구석이 어디에도 없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라는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삶을 시간 순으로 쫓아가는 영화는 좀처럼 무엇 하나 단정지으려는 기색이 없다. 시선의 부재를 말하는 건 아니다. 영화엔 분명 의도적으로 삽입된 화면이 여럿 있고, 곡의 순서나, 'Home'에서 시작해 'I have nothing'으로 끝나는 흐름은 그 자체로 감독의 시선이다. 그러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휘트니'도 다분히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나에게 '서치'와 '휘트니'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사건이 풍경으로 흐르는 영화와 주인공인 영화, 여백이 자리하는 영화와 그러지 못하는 영화, 무언가를 남기고 가는 영화와 끝이 그저 끝인 영화. 물론 이건 그저 도식적인 구분일 수도 있다. '휘트니'도 '서치'도 전적으로 전자이거나 후자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는 '서치'가 아닌 '휘트니'를 떠올린다. 폭력과 상처, 우울과 슬픔이 얼룩진 시간이 이어지는 장면 속에, 그간 수백번은 들었을 노래가 헤아릴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오고, 자연스레 뭉클한 감정이 가슴 깊숙이 남는다. 누군가의 의도로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 어딘가에 남는다. '가까운 가족, 친족.' 그저 사실을 가리키는 자막이 쌓여갈 뿐인데 나는 말 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고, 그렇게 숨이 막혔을 휘트니, 니피가 떠올랐다. 엄마의 꿈으로 태어나 끝내 모든 이의 꿈이 되었고, 동시에 무참하게 무너져내린 휘트니를, 영화는 그녀가 가슴으로 불렀던 노래, 그 아이러니하고 공허한 사랑 속에 두고 떠나간다. 'I have nothing', 메마른 시간의 그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는 건, 결코 집을 찾지 못한 미아, 휘트니의 삶이다. 

영화가 영화로 느껴지는 건 최소한 내게 삶이 삶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무수히 많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영화는 종종 나의 자리를 안겨주곤 한다. 착각, 망상일지 몰라도 나는 그 순간, 그 만남의 시간에서 비로서 영화를 본다. 단순히 '내 얘기 같다'거나 '내게 얘기하는 것 같다'이기도 하고, 그저 나와 닮은 누군가의 시간을 마주했을 때의 막연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렇게 공감은 돼도 좋아할 수 없는 영화가 있고, 허점 투성이지만 좋아지는 영화도 있다. 예리한 계산, 치밀한 구성, 그런 뚜렷한 서사가 아닌, 보이지 않는 무언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못하는 그런 서툼 속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웃음을 짓는다.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최소 그 만큼의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을 마주하는 사람의 태도도 그만큼 다르다. 기질, 감각. 어쩌면 그런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사이, 다름과 다름, 어디에도 자리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마는 그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렇게 마주하는 영화에서 나는 최소한 혼자가 아니고, 실은 별 거 아닌 안도는 사실 내게 삶 그 자체다. '서치'는 내게 핸드폰 창 바닥에서 그저 꿈틀대기만 하던, 채워지지 못한 말풍선이었고, 내게 '휘트니'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던 스웨덴에서의 'I have nothing'이다. 이건 그저 '서치'를 보고 이틀 후 '휘트니'를 봐서 하는 이야기고, 어디까지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슈퍼볼 하프 타임에서 울려퍼졌던 휘트니의 'The star-bagled banner'가 서로 다른 누군가의 서로 다른 애국가였던 것처럼, 나는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의 옆에서, 어쩌면 누군가의 뒤에서 그저 영화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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