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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Sep 18. 2018

가장 애절한 8시간

어제와 어제의 시간, 체실 해변에서


문을 열고 식탁에 다가가는 몇 걸음, 원피스의 지퍼를 내리는 몇 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구두와 벽을 넘어 들려오는 복도의 웃음 소리. 고작 1미터의 거리는 지난히 멀고도 멀다. 영국 남부 한적한 해변, 체실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사실 이렇다할 줄거리가 별로 없다. 영화의 시작과 끝만을 보면 그렇다. 갓 결혼한 부부 플로렌스(시얼샤 로넌)와 에드워드(빌리 하울)가 체실 해변의 어느 호텔에 도착해 하루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보내는 게 이 영화의 전부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플래시백으로 시간과 시간 사이의 드라마를 길어낸다. 고작 반나절 남짓한 시간에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지난 날이 담기고, 그 자잘한 아픔과 기억이 자그마한 호텔 방, 마주앉은 플로렌스와 에드워드, 테이블 이 편과 저 편 사이를 오간다.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20년 이상의 향기를 풍기는 시간. '체실 비치에서'는 분명 이곳의 영화가 아니다. 사실 거칠게 영화의 인트로만을 훑으면 '체실 비치에서'는 꽤나 코믹컬하다. 웨딩 첫 날의 와인은 직원의 실수로 물이 반쯤 섞여 있고, 침대에 이르기까지 작고 작은 사고는 사실 섹스 코미디의 클리셰이기도 하다. 하지만 '체실 비치에서'에는 그런 웃음으로 넘겨버리기 힘든 질감의 시간이 있다. 선뜻 나아가지 못하는 대화, 여전히 남아있는 오래 전 시간의 기억, 둘 사이의 놓여있는 접시와 컵,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 그렇게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 창을 넘어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체실 비치에서'는 감을 잡기에 한참이 걸리는 영화다. 이제 갓 결혼을 한듯한 부부가 신혼 여행을 와 호텔 방에 도착했다는 건 어림 짐작이 가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말들, 작은 손짓, 그리고 움직임은 좀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망설임과 주저, 결혼 첫날의 긴장 같은 거겠지만, 영화는 애초에 둘 사이에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서사를 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 후반까지 영화를 움직이는 건 아직 남아있는 시간의 작은 떨림이고, 그렇게 진동하는 호텔 방의 공기다. 왜인지 잘 내려가지 않는 원피스 지퍼, 구두를 벗으려는 발버둥. 대부분의 영화들이 으레 코미디로 풀어나갈 설정들을 '체실 비치에서'는 순간에 쌓여있는 둘의 시간으로 이어간다. 에드워드에겐 사고로 병을 얻은 엄마라는 상처가 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플로렌스는 아직 섹스 앞에 설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수석을 했음에도 말 할 사람이 없어 누군가를 향해 질주하고, 콰르텟을 꿈꾸지만 피아노 앞에서 페이지를 넘기고 , 엄마의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알 수 없는 분노가 쌓여가는 시간. 그런 쓸쓸하고 애처로운 시간이 체실 해변의 어느 호텔 방에 흐른다. 영화는 어쩌면 조금 다른 시간을 사는지 모른다.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을, 사이와 사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어제의 흔적을 드러내며, 시간 이상의 시간을 그린다. 그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시간이고, 망설임과 주저가 쌓여가는 시간, 현재에 가려있던 어제의 서로 다른 그늘이 마주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사랑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사랑에 빠지다, 사랑을 놓치다. 영화의 홍보 문구 그대로 '체실 비치에서'는 만남과 이별, 사랑과 실연의 이야기다. 멜로 영화의 전형, 로맨스 영화의 고전, 투박하게 말하면 그렇다. '체실 비치에서'는 어김없이 그런 영화다. 하지만 '체실 비치에서'는 두 문장 사이의 몽연함, 아련하고 희미한 느낌의 무언가이기도 하다. 영화가 그리는 건 사랑 이후의 달콤함, 이별 이후의 씁쓸함, 사랑 이후 떠오른 해, 이별과 함께 내리는 비와 같은 앞뒤가 뚜렷한 서사가 아니다. 만남은 이별을 품고 있고, 아슬아슬한 순간은 사랑의 떨림으로 흘러간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손의 떨림, 자꾸만 식탁 아래 허공을 더듬게 되는 구두와 힐, 고작 테이블과 침대 사이일텐데 하염없이 멀고도 멀게 느껴지는 거리.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가져온 영화는 그런 면에서 영화보다 소설에 가까운 리듬 속에 있다.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한 순간, 영화는 그렇게 굴러간다. 둘의 헤어짐에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저 어느 또 하나의 순간 하나에 불과하고, 그렇게 사랑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랑과 이별이란 이름의 여리고 여린 지난 기억들의 이야기. 쓸쓸함이 밀려오는 해변, 헤어짐이 요동치는 파도, 둘은 서로 등을 돌리지만 들려오는 '이제 계속 함께'라는 말. 그저 또 한 번의 파도가 밀려왔다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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