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Sep 06. 2018

현실 벼랑 끝의 일본, 드라마의 대역전

모두 다른 게 자연이니까, 그냥 두는 게 낫다. 한일전이거나 일한전이거나



https://youtu.be/Js-FGQlA7HU

‘어쩌면 51번째 도쿄’란 글을 쓰고 ‘광복절에 경우가 아니죠’란 댓글을 받았다. 며칠 전 축구 경기에선 황희찬이 지금 일본에서 신드롬이 된 Da Pump의 ‘USA’를 연상케 하는 세레머니를 했다. 한국에선 그닥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떤 국내의 웹에서도 본 적이 없어,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알아챈 이가 있다면 역시나 ‘경우가 아니죠’라 얘기를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노래는 각자의 노래, 댄스는 각자의 댄스. 한일전이거나 일한전이거나. 한국의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나는 어김없이 답답한 90분에 열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은 어쩌면 생각보다 복잡할지 모르겠다. 얼마 전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만비끼 가족’은 일본에서 1주일만에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깐느 수상에 더해 감독의 인기로 기대로 모았던 ‘어느 가족’은 한국에서 별 성적을 내지 못했다. ‘만비끼 가족’과 ‘어느 가족’의 차이, 그렇게 서로 다른 세상. 조금 더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터뷰에서 친아들에 대한 존재를 알고,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낸 아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한 켠 불쑥 찾아든 친아들에 대한 마음을 무시할 순 없다’고 말했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때의 이야기. 낳은 정 못지 않게 기른 정을 얘기하게 된 요즘, 그럼에도 모른 척 할 수 없는 피의 흔적. 그렇게 다시 복잡한 세상. Da Pump의 U.S.A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촌스럽고 유치하다 투덜댔지만, 지금 나는 그들의 노래를 반복해서 보고 듣는다. 일본에선 그들을 ダサガッコイ라 얘기하고, 그건 촌스럽게 멋있다란 의미다. 


다시 일본 드라마를 본다. 꽤 오래 힘을 잃은 일본 드라마가 다시 생기를 찾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내겐 세 번의 입원과 퇴원, 스다 마사키의 라디오 '올 나이트 니뽄'과 데뷔 15년 만에 알게된 밴드 '후지패브릭(フジファブリック)', 그리고 키세루(キセル)의 적막하기 그지 없는 PV '하나만 바꿨다(一つだけ変えた)’ 이후 찾아온 계절 같은 이야기다. 고작 2년, 겨우 730일, 그만큼 투박한 시간. 하지만 사카구치 켄타로의 나이는 사진집 제목대로 26.5살이고, 패션지 'Oceans'의 타깃은 37.5세다. 어쩌면 세상엔 서로 다른 시간도 흘러간다. 소수점 이하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몇 편의 드라마를 보았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줄임말을 좋아하는 일본에선 이 길고 긴 제목을 '니게하지'라 말한다)와 '언내츄럴.''벼랑 끝의 호텔'과 '미야모토가 너에게.' 소재도, 제목의 질감도 전혀 다른 이 드라마에서 나는 어딘가 닮은 뭉클함을 느낀다. 물론 '니게하지'와 '언내츄럴'을 쓴 건 모두 노기 아키코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작가 이름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투박함이 아니고, 추리와 스릴러, 그리고 드라마와 코미디로 구분되는 장르의 차가움도 아니다. 동성애와 결혼, 여자의 일과 가정, 그리고 취업과 실패를 '니게하지'는 한 사람의 시간 안에서 풀어내고, 부자연스런 죽음을 파헤치는 '언내츄럴'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 곁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끝나버린 시간이 스쳐간다. '벼랑 끝의 호텔'의 이름은 포르투칼 어로 Inversao, 대역전', '미야모토가 너에게'에서 '너'가 가리키는 건 결국 '너'가 아닌 '나.' 나는 어쩌면 어제의 내가 아니고, 지금 일본에선 가려졌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어느 저녁 기사를 하나 보았다.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에 실린 '니게하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제목에 끌려 모두 읽기는 했지만 남은 건 결국 제목이 준 묘한 용기 뿐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만비끼 가족'이 '어느 가족'이 되었을 때의 실망감, 딱 그 느낌 만이 남았다. '니게하지'는 꽤나 사회적인 이야기다. 다루고 있는 소재 만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드라마가 바라보는 건 그런 충돌, 이슈,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가려지고 간과되는 사람들의 시간들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고, 그렇게 알고 알지 못하는 것들이 혼재하고,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가는 서툼 속에 '니게하지'는 살아간다. 주인공 미쿠리는 취업의 실패 이후 많은 고민을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결국 어딘가에 살고있을, 자신과 닮은 누군가고, 그렇게 공감되는 실패와 망상의 시간이다. 누군가의 이렇게 소박한 바람이 충돌을 일으킬 이유는,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 작고 사소한 바람이 드라마를 쌓아간다. 동성애가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가족이란 허들, 여성이 안탑깝게 직면하고 마는 가사와 일의 현재. 그래서 싸우고 또 싸우는 지금이라는 시간. 하지만 '니게하지'는 그러한 투박하고 치열한, 그래서 때로는 불필요한 소모의 시간을 그리지 않는다. '니게하지'가 바라보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시간이고, 다름이 다름으로 흘러가는, 어쩌면 당연한 세상 속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가려진 삶이다. 주제 넘는다 미움받았던 망상이 드디어 마주하는 이해의 시간, 현실에서의 도망이 아닌 자신의 시간으로의 돌아감. 세상은 그렇게 사람을 품어낸다. 


'니게하지'의 미쿠리에서 '미야모토가 너에게'의 미야모토를 떠올린다는 건 사실 꽤나 과한 착각이다. 둘은 질감도, 온도도, 템포도 너무나 다르다. 하지만 나는 미쿠리에서 미야모토를 생각하고, 미야모토에서 미쿠리를 느낀다. 미쿠리의 망상이 흘러가는 '니게하지'는 어딜 보아도 말끔한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みなとみらい)가 무대고, 미야모토의 좌절이 꿈툴대는 '미야모토가 너에게'는 요요기역 플래폼에서 시작한다. 미나토미라이(みなと未来)와 전차 플랫폼. 망상과 좌절. 그만큼 다른 두 드라마는 어쩌면 같은 내일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세상과 마주하고,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는 둘은 비록 서툴고, 볼품없긴 하지만 누구보다 농밀한 시간을 살고있다. 미쿠리의 좌충우돌이 드러내는 동거남 히라마사의 닫혀있던 시간, '울 거면 화를 내라'던 미야모토의 외침이 일으키는 기적같은 파도. 누군가의 성공이 누군가의 실패를 가리고,  누군가의 결혼이 누군가를 움추리게 하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아픔의 시작이 되고, 그렇게 서로가 각자의 시간에 갇힌 세상에서, 드라마는 누구의 탓도, 누구의 잘못도, 싸움도 다툼도 아닌 세계를 드러낸다. 요코하마에서 요요기까지는 전차로 30분 정도 거리, 미쿠리의 새햐얀 좌충우돌 곁엔 미야모토의 습도 높은 어둠. '니게하지'의 마지막회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이지만 진부하지 않고, '미야모토가 너에게'의 엔딩은 또 다른 실패의 시간이지만 내일을 향하고 있다.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내일이 아닌, 그저 우리가 잊고 있던 내일이다. 

'언내츄럴'은 거칠게 이야기하면 추리 수사물이다. 미결 사건을 담당하는 UDI를 배경으로 누군가의 죽음에 가려진 미스테리를 밝혀내는 일들이 회별로 이어진다. 한회 완결 구성의 드라마. 하지만 '언내츄럴'은 그렇게 건조하고 스릴로 재미를 쌓아가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야기가 흐를수록 전해지는 건 퍼즐이 완성되었을 때의 희열이 아닌 묻혀질 뻔 했던 누군가의 이야기고, 애절함을 구하려는 애씀, 그렇게 구원되는 순간의 뭉클함이다. '니게하지'와는 꽤나 다른 소재의 드라마지만 여전히 노기 아키코의 작품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 드러나지 않는 애씀, 안쓰럽게 잊혀지고 묻혀 버리는 시간. 어쩌면 지금 일본은 현실 벼랑 끝의 시간을 애기하고 있다. 여기저기 흐르는 막말과 이유없는 혐오, 본말이 전도되는 날들의 험난한 시간에서 일본은 그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츠지다 히데오의 오리지널 드라마 '벼랑 끝의 호텔' 속 호텔은 모두의 시간이 위로받는, 실패가 대역전의 순간을 맞이하는 장소이고, 얼마 전 시부야에선 여성 인권, 장애자, LGBT의 작은 목소리를 낸다는 취지로 89X63mm 사이즈의 신문, 'Silenced Nespaper'를 발행했다. 어느 CM에 등장한 '모두를 한가운데'라는 카피, 고흐의 그림에서 시작된 NHK의 '해바라기가 청소해줄께'란 영상의 위로, 그리고 '벼랑 끝의 호텔'이 얘기하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 것.' 뒤틀림, 어긋남, 알 수 없는 꼬임과 수많은 오해. 그렇게 '언내츄럴.' 다시한번 고레에다의 말을 빌리면 '모두는 다 다르고 그게 자연이니까 그냥 두는 게 낫다.' 한일전이거나 일한전이거나. 



매거진의 이전글 아마도 51번째 도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