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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19. 2018

지나간 시간을  주워 담을 순 없지만

그렇게 애달픈 계단을 오른다, '친애하는 우리 아이'


영화 '친애하는 우리아이'는 제목부터 이상하다. 좀처럼 쓰지 않는 수식어, 왜인지 현재형이 아닌 듯한 과도한 뉘앙스, 원제를 찾아보니 히게마츠 키요시의 소설은 '어린 아이 우리 집에 태어나(幼な子われらに生まれ). 어딘가 시간을 멈춰 세우고, 시작 아니면 끝, 현재에 남아있는 듯한 지난 날을 암시하는 불안한 기운이 영화엔 흘러간다. 주인공 타나카(아사노 타다모부)의 출퇴근 길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엘레베이터의 도착 아나운스가 들려오고, 카메라는 왜인지 엘레베이터 옆 길고도 긴 계단을 바라본다. 단란한 가정의 그저 일상적인 장면으로 스쳐가는 이 대목은 이상하리만치 반복되며, 타나카가 선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갈림길, 삶의 이곳이 아닌 저곳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선택이 남기고 간 포기의 시간. 타나카와 타나카의 아내 나나에(타나카 레이)는 얼핏 두 아이를 가진 단란한 가정의 부부로 보이지만, 둘은 이미 모두 한 번의 결혼에 실패했고, 타나카에겐 쇼트 케이크가 아닌 핫도그를 먹으며 반쪽짜리 하루를 보내는 또 한 명의 딸 사오리(카마타 라이쥬)가 있다. 재혼이 만들어낸 가정의 보이지 않는 부딪힘, 아버지와 아빠, お父さん과 パパ 사이의 어찌할 수 없는 거리감. 영화는 그렇게 감추고 싶은 가정의 어찌할 수 없는 아픔에서 시작한다. '친애하는 우리 아이', 이처럼 지독한 반어의 문장은 없고, 역방향의 열차는 그저 멀어져가는 철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사실 '친애하는 우리 아이'는 처음부터 불안하다. 하늘은 새파랗고, 유원지의 회전 목마는 유아틱한 원형을 유유히 돌고있지만, 무지개빛의 바닥에서 한 남자는 언제 그랬는지 모를 신발의 풀어진 끈을 새로 동여맨다. 딸 사오리와 입에 케첩을 묻혀가며 핫도그를 먹고 있지만, 타나카의 맘 속엔 아직 끝을 맺지 못한 메일이 남아있고, 또 다른 딸 카오루(미나미 사라)는 왜인지 말문을 닫아버린다. '많이 컸네'라는 타나카의 말에 사오리는 '카오루도 봐왔으면서'라,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행복한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 짧은 문장 안엔 한 해에 고작 네 번 만나는 딸에 대한 미안함, 동생임에도 섣불리 언니로서 마주할 수 없는 머쓱함이 배어있다. 고작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뿐일텐데, 이 진부하고 흔해빠진 가정은 끝나버린 시간을 어찌하지 못해 흔들린다. '친애하는 우리 아이'는 어김없이 재혼 가정의 불협화음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꾸린 또 한 번의 집이 외면하고, 포기한 절반의 시간이 꿈틀댄다. 타나카와 나나에가 두 딸의 동생을 낳으려고 할 때, 타나카가 혼란을 느끼는 건 또 한 명의 언니 사오리와의 시간 때문이고, 그건 분명 선택이 남기고 간 후회의 떨림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놓쳐버린 계단의 풍경, 그렇게 쓸쓸하고 가녀린 시간. 역방향의 열차를 돌릴 순 없고, 아빠는 왜인지 아버지가 될 수 없다.


마치 최근의 이야기같지만 가족의 틈을 비집고 새어나온 아픔을 이야기한 작품은 이미 오래 전 부터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 영화는 물론이고, 성소수자 문제와 함께 불거져 나온 대안 가정 부류의 이야기도 어김없이 지금 일본의 가족을 의심한다. 오기가미 나오코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로 꽤나 커다란 변신을 한 것 같지만, 오기가미 감독은 이미 카페와 같은 공간에서 가족이 아닌 '그저 함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그려왔다. '친애하는 우리 아이'도 거칠게 구분하면 역시 이런 흐름의 한 작품이다. 하지만 여기엔 선택과 포기로 시간의 갈림길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엘레베이터에서 계단으로 발길을 돌리는 무언가의 노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나카의 전처 유카(테라지마 시노부)를 친구라 부르는 애씀이 있다. 친아빠와 새엄마, 배다른 딸과 배다른 아들. 하지만 그보다 더 깊고 복잡한 굴곡의 시간. 영화는 이 언저리 어느 곳에서 과거도, 현재도 아닌 '지금'을 바라본다. 그 순간의 계단을 쌓아간다. 죽음의 문턱에서 위태로운 남편을 곁에 두고 유카가 하염없는 후회의 시간을 훑을 때, 영화는 그렇게 스쳐간 애달픈 지금을 슬퍼한다. 하지만 혼자였다면 시작도 되지 않았을 이야기. 최선은 아니지만 후회도 포기도 아닌 '순간을, 영화는 빚어낸다. 다시 한 번 풀어진 신발 끈을 동여매듯, '지금'이란 이름의, 또 하나의 갈림길을 바라본다. 비를 머금은 무지개처럼, 눈물을 머금은 시작을 출발한다. 그렇게 애달픈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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