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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01. 2019

밤의 현실, 꿈의 흔적  '아사코 朝子'

영문도 모르면서 나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https://youtu.be/f_M3V4C8nWY


꿈의 도중 잠이 깨어 다시 눈을 감아도 돌아갈 수 없다. 조금 전까지 선명했던 그림은 흐릿한 방 풍경 너머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런 며칠, 이런 몇달, 이런 나날을 보내고, 상수동 어느 언덕길을 걷다 이런 노랫말을 만났다. 우타다 히카루가 8년의 공백을 지나 만든 앨범 'Fantome'의 수록곡, 제목은 이 겨울에 '한 여름에 스쳐가는 비(真夏の通り雨).' 고작 40 년을 조금 모자라게 살았지만, 이제야 문득 뒤를 돌아본다. 왜인지 도쿄행 비행기를 끊고, 왜인지 오래 전 살던 동네를 걷고, 왜인지 아늑했던 기억 속 극장에 가 영화를 보았다. 어쩌면 기회는 여러 번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노래를 듣고, 무언가를 쓰는 나날 속에. 나는 '어쩌면' 또는 '아마도', 아니면 '왜인지'란 말을 무심하게 수도없이 뱉고있다. 불미스런 퇴사, 갑작스런 입원, 서둘렀던 퇴원과 텅 빈 시계 소리만이 작은 방을 울리던 시간. 어쩌면 이유는 확실히 있었는지 모른다. 붙임성이 없는 내게 직함이 사라지고 싸늘해진 공기는 당연한 일이었고, 하루의 절반 즈음을 회사에서 보낼 때의 외로움과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밥을 먹을 때의 외로움은 질감이 봄과 겨울만큼 다르다. 조바심에 일년의 절반을 살고, 조바심을 억누르며 나머지 절반을 보냈다. 매일 밤 잠을 미루며 어긋난 기억 속을 헤매는 사이, 외로운 계절은 하나둘 쌓여갔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를 본 건 고작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트위터 한 조각 때문이다. 이후 검색을 해보니 하마구치 감독은 3시간이 넘는 데뷔작 '해피 아워(ハーピーアワー)'로 일본 영화계를 흥분하게 했던 남자이지만, 나는 그저 '寝ても覚めても', 이 제목의 뿌연 느낌이 좋았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시간, 알 수 없는 것들로만 채워진 꿈과 같은 일곱자 짜리 세계. 국도 246길 한켠 '이미지 포럼'에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엉엉, 펑펑, 끄억끄억 울었다.

이른 저녁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도쿄에서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퇴원 후 몇 번 들렸던 도쿄와 열흘 정도 묵었던 부산 바다 근처 호텔에서부터 일어난 일이다. 새벽이 넘어 누워도 눈을 뜨면 고작 두 시간쯤 지나있고, 나는 요즘 집에서 늦잠을 잘만 잔다. 인천 남동구 논현동과 도쿄 시부야 혹은 신주쿠, 그리고 부산 해운대의 어느 호텔 사이. 나는 이 차이를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를 보기 전날에도, 잠을 자지 못했다. 이불을 덮고 몇 번을 뒤척이다 결국 포기했고, 새벽같이 호텔을 나와 사쿠라가오카(桜丘) 언덕을 걸었다.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허기를 달래고, 아마도 수 십번은 걸었을 국도 246길을 걷고, 그 시간에 문을 연, 담배도 피울 수 있는 도토루 카페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고, 건널목을 건너고 길목의 스타벅스를 지나, 영화의 티켓을 샀다. 예상을 넘어 쌓인 눈과, 지연된 비행기 탓에 두 시간 짜리 밤 만이 남아있던 첫날이 지나고, 나는 그 만큼의 아침을 걸었다. 오전 10시 30분의 첫회 상영.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자고 영화 '잘 때도 깨있을 때도'를 보았다. 기묘한 사운드가 빗방울 떨어지듯 화면을 스치는 영화는, 왜인지 밤의 현실, 꿈을 닮아 있었다. 폭죽이 터지는 조금 기묘한 아침에, 여자는 지나가고, 남자는 뒤를 돌아본다. 현실에서 가능한 가장 이질적인 사운드와 흐릿한 인상의 여자 아사코(朝子), 그리고 이름조차 미궁같은 남자 바쿠(麦). 남자는 이유없이 도심 아침에 흐르던 기묘한 멜로디를 흥얼대고, 나는 아마도 이 영화를 알 것 같았다. 어김없이 졸음은 몰려와, 자고 있는 듯 깨어있는 듯 스쳐가는 화면들을, 나는 졸고 있는 나를 비웃을지 모를 누군가를 쓸데없이 신경쓰며 바라봤다. 다행이도 정신은 개운해져, 댜시 두 눈으로 바라본 장면은 아사코(카라타 에리카)가 차를 타고 멀어져 가는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바이바이'라 외치던 장면이었다. 영문도 모르면서 나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시바사키 토모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쉽게 말해 삼각 관계 이야기다. 소설은 연애 소설로 분류되고, 영화는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서 방황하고, 바둥대는 여자 아사코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을 울려대던 불길한 소리처럼 바쿠는 료헤이를 닮아있고,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바쿠와 료헤이, 1인 2역을 연기하지만, 그만큼 애매하고 아리송한 말도 없다. 마치 '나와 또 하나의 나', '내 안의 가려진 나'를 은유하듯, 아사코와 바쿠가 보던 전시는 'self & others'가 아닌 'self & other'이다. 아사코와 바쿠의 대학 시절에서 영화는 시작하고, 이런저런 현실의 일상을 품고 흘러간다. 하지만 초반부터 '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는 이미 젊은 남녀의 흔해빠진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바쿠와 아사코가 나누는 말들은 왜인지 유독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부유한다. 처음 만나 서로의 이름을 음미하는 이상한 시간, 사고를 당하고도 상처 하나 없이 아스팔트 바닥에서 울려퍼지는 오묘한 웃음, 하늘과 땅 만이 전부인 듯한 길과 돌아오지 않는 이가 남기고 간 '올 테니까 기다려줘'란 말의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 이름을 풀어보면 아사코는 아침(朝)과 사람(子)이고, 바쿠는 일본인 이름답지 않은 성 麦을 쓰고 바쿠라 읽는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내리고 배달을 하는 '아사코'가 아닌 그저 아침 곁에 있는 사람 '아사코', 최소한 일본엔 없는 듯한 성을 가진 오묘한 느낌의 남자 '바쿠', 어쩌면 여기가 전부가 아닌 세계의 어느 길이거나, 고작 이름에만 남아있는 어느 세계의 작은 흔적같은 시간을, 영화는 걸어간다. '잘 때도 깨있을 때도'는 2017년 만들어져 지난해 가을에 개봉했지만, 2009년 동북 대재난의 흔적이 스쳐가고, 하마구치 감독은 '알 수 없는' 상처, '알 수 없는' 아픔, '알 수 없는 이별'과 '알 수 없는' 상실을, '바쿠'와 '료헤이', '朝'와 '子', 강물을 거슬러 바라본 바다로 풀어낸다. 지난 시간 나를 가장 아프게 울린 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고, 지난 해 칸느 영화제에 출품됐을 당시 이 영화의 제목은 'Asako I & II'였다. '재혁씬 무거워요', '돈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지난 해 누군가가 내게 해준 이 말에 나는 웃음도 눈물도 아닌 묘하게 안심했다.

https://youtu.be/8bCczVDFcow

많은 걸 잃은 시간이었다. 많은 걸 포기한 시간이었다. 많은 게 떠나간 시간이었고, 많은 게 어긋난 시간이었다. 대화가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때, 애씀이 오히려 오해를 불렀을 때, 기대가 화살이 되어 돌아왔을 때, 나는 그저 이불을 덮고 방문을 닫았다. 일 년 넘게 약을 먹고, 반 년이나 지나서야 '우울증'이란 진단을 겨우 받았지만, 나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 작은,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공감도 0%의 믿음을 갖고 살았다. 그렇게 버텼다. lamp의 노래를 듣거나, 스다 마사키의 해가 지고 밤이 되어야 드러나는 반짝이는 어둠에 눈을 감았다. 스피츠의 노래를 들으며 김해를 출발한 비행기 안에서 펑펑 울었고, 부산에서 홀로  보냈던 cero의 '대정전의 밤(大停電の夜に)에'가 여름 밤 상수동에서 흘러나왔을 때, 내 온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37년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을 보내며, 그래도 나는 나를 만났다. 람프에도 내가 있었고, 스피츠의 노래에도 내가 있었고, 쎄로의 부산의 새벽을 닮은 밤에도 내가 있었다. 그저 일정이 맞아 고른 밴드 odol의 공연에서, 모든 조명이 꺼지고 무대 곳곳의 필라멘트가 불안한 빨간 빛을 내고 있을 때, 삐, 삐, 삐. 마치 병실의 심박수를 알려오는 듯한 가냘픈 소리가 음악이 되려고  할 때, 나는 외롭지 않았다. 울고 있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에서 아사코의 친구 하루요(이토 사이리)는 아사코를 얘기하며 '흐릿해보이지만, 직구인 데가 있어요'라 말하는데, 나는 '무겁고 돈이 되지 않는' 나를 떠올렸다. cero의 '대정전의 밤에'의 뮤직 비디오가 촬영된 곳은 내가 살던 도쿄 미타카다. 이제는 그만 둔 면접을 도와주던 일본인이 얘기한 '붕 떠있어요'란 말, 면접이 끝나고 전해 들은 '소설같은 말을 한다'는 이야기. 나는 B형이지만 사실 매우 A형스럽고, 그런 말을 농담처럼 자주 하곤 했는데, 그건 그냥 강과 바다의 관계 비슷한 무엇인지 모른다. 아사코(朝子)의 朝와 子같은 관계인지 모른다. 솔직히 나는 내 안의 '바쿠'를 믿고 있지만, 나는 어김없이 돈을 벌어야 하고,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료헤이'의 말이다. 마치 odol의 보컬 미조베 료가 자신의 이름을 한자가 아닌 카타카나, 히라가나도 아닌 카타카나 ミゾベリョウ로 쓰는 것처럼, 나는 B형이어도 괜찮다. odol의 노래 중엔 '밤을 벗어나면(夜を抜けると)’이란 곡이 있다.

사카모토 유지의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서 미츠오(에이타)와 유카(오노 마치코)는 모든 걸 잃어버린 서로를 보고 부부가 된다. 311 대지진의 밤, 전차도 버스도 없이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연약한 마음은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에서 이제 막 시작을 앞둔 공연은 갑작스레 무언가(아마도 지진이지만 영화는 확실히 하지 않는다)에 의해 중단이 되고, 소동 속 거리의 여자는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괜찮냐'는 료헤이의 말에 그녀가 건넨 건 '고맙습니다'라는 말 뿐. 두 문장 사이에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모르는 거 투성이인 건 지극히 보통의 현실이다. 고작 지류 곁에서 살아갈 뿐인데 바다를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나는 '잘 때도 깨있을 때도'의 이러한 세계가 애절하고 고마웠다. 단 아침 한 끼를 같이 먹기 위해 도쿄까지 신칸센을 타고 다니며 연애를 하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갑작스런 충격으로 길바닥에 떨어진 공연의 포스터를 료헤이는 바로 세워 놓는다. 바쿠를 알게되고 아사코는 몹시도 혼란에 힘들어하지만, 그녀와 료헤이가 함께 보낸 몇 년의 시간은 그저 평화롭고 완전하다. '아침(朝)을 바라보는 아사코(朝子)를 바라보는 료헤이에 반할 것 같다'는 문장, 료헤이와 아사코의 친구인 마야(야마시타 리오)가 장난 투로 얘기한 이 말. 어쩌면 이 문장은 강물에 남아있는 바다의 은유일지 모른다. 꿈으로 찾아오는 밤의 현실일지 모른다. 마음을 닫아버린 료헤이를 붙잡으려 아사코는 달리고 또 달리고, 아사코를 밀어내기 위해 료헤이는 달아나고 또 달아나고. 비에 흠뻑 젖은 둘의 울먹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무너지게 울었다. 아마도 나이고 싶어하는 눈물, 알 수 없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용기, 그럼에도 그만 울고 싶은 욕심. 앵콜을 하지 않는 밴드 odol은 비가 조금 내리던 전날 밤 무려 다섯 곡을 앵콜 이후 불렀고, 나는 눈물을 닦고 신오오쿠보에 가 규동을 먹었다. 2년 전 어느 무렵부터 나는 조금 이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훨씬 이전부터 이미 나는 이상했고, 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나를, 나는 잃고 싶지 않다. '꿈이거나 현실이거나', 바꿔말하면 '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영화 엔딩에 흐르는 건 바다가 아닌 tofubeats의 'river'고,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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