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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02. 2019

눈 내리지 않는 겨울,
도쿄의 열 두 조각

2019년, 지금은 25시


12월 중턱에 도쿄를 다녀오고, 2주. 모든 기억이 하루 즈음 뒤늦게 기록됐다. 사람이 붐비는 것도, 연말과 연초의 거창한 흥분도 내게 어울리지 않지만, 여전히 시부야를 걸었고, 종종 한적한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꽤나 연말스러운 이 글 조차 이틀 늦은 지각생. 여행은 다녀온 후 기억으로 완성되는 부분도 있고, 내게 이번 도쿄는 먹고 놀고 즐기는 여행이 아니었지만, 열 두 조각의 발자국으로 내일을 생각한다. 

eiki mori, letter to my son

#1

소복소복 눈이 내리던 날의 초속 5cm, 도톰히 쌓인 눈에 더뎌진 수트 케이스의 바퀴, 고작 100m에 저려오는 두 팔과 한 시간 넘게 늦어져버린 도쿄발 비행기. 엘레베이터와 계단을 몇 번이나 지나 나온 시부야는 여전히 아직 걷지 못한 거리같고, 모범적일 만큼 친절한 택시에 얼룩진 마음이 살짝 놀란다. 왜인지 사쿠라가오카(桜丘)란 이름이 좋아 근처에 호텔을 잡은 나는, 스무 걸음 쯤을 걸어 술을 한 잔 마시고, 골목 뒤에 숨은 카페에서 책장을 덮는다. 2년 전 그 날에도 눈이 많이 왔고, 그 날 놓쳤던 막차를 오늘은 조금 여유있게 탔다. 어쩌면 그냥 망상과 오기 어린 착각.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쫓으며 실망하고, 잊고있던 나를 만나 아파할 시간이 거리 곳곳에 보인다. 어쩌면 오지 않아도 됐을 도쿄, 하지만 어김없이 남아있는 도쿄. 바보같이도 지금은 25時.


#2

지연된 비행기 탓에 반나절을 홀랑 까먹고, 새벽에 밤을 걸으니 불켜진 가게가 편의점 옆에 나란히 보인다. 일본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정말 ‘패밀리’ 식당이라, 온갖 메뉴가 잡다하고, 편치 않은 배를 생각해 죽에 가까운 雑炊를 주문했다. 넓직한 대접의 죽을 다 먹고, 담배를 몇 대 피우고, 책을 몇 장 읽어도 아홉시 언저리. 회사를 나와 랜덤하게 흘러가던 시계는 유독 어딘가로 떠나올 때 잘 줄을 모른다. 지난 여름 도쿄에서, 지난 해의 부산에서, 나는 어제인 듯한 오늘을 밟고 지냈다. 돈키에 가 필요한 것들을 주워담고, 찾지 못한 물건을 사러 가기까지 몇 십분을 기다려야 한다. 새벽에 일어났다 정오가 넘어 일어나고, 밤을 샜다 하루 종일 자고.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간에 그냥 아침이 온 것 같다. 내가 있던 패밀리 레스토랑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고, 베니즈와이가니조우스이, 베니즈와이가니조우스이, 이 메뉴를 주문하다 나는 몇 번을 버벅이고 말았다. 


#3

지난 해 여름과 올해 겨울. 도착한 지 일곱 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분일초가 아쉽다. 동네 산뽀하듯 편의점 가는 길. 자지 못해 밤인듯 아침인듯, 자기 싫어 어제인 듯 오늘인 듯. 


#4

노무라 슈헤이와 노무라 슈헤이와 노무라 슈헤이와 노무라 슈헤이와 노무라 슈헤이와 하라쥬쿠. 사쿠라가오카쵸에서 시작해 캐트스트리트, 우라하라까지 뒤지고도 맘에 드는 걸 찾지 못해 막 포기하려던 순간, 뒤를 바라보니 노무라 슈헤이가 보였다. 얼마 전 beams의 FACE 캠페인 광고. 겨울을 잊은 햇살에 이만한 거리가 있을까 싶고, 두 발이 주저 앉기 직전의 나는 나이를 잊은 채 한참을 있었다. 


#5

작은 간판 하나만 기억하고 찾았던 카페는 전혀 다른 동네에 있었다. 시끌벅적 화려한 센터가이 사이길에 숨은, 이름도 왜인지 아담한 우다가와쵸는 귀여운 필기체를 쓴다. 오래 전 시부야를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보고 기억했던 것들이 왜인지 다르게 느껴지고, 어쩌면 또 틀릴지 모를 지금의 감각이 왜인지 편안하다. 시부야에 호텔을 잡고, 하루 반나절을 시부야에서 보내고, 종종 시부야가 좋다고 말했던 나는, 그러고보니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열흘동안 출퇴근 하듯 시부야의 거리를 걸었다. 흐릿해진 오래 전 기억에서 변해버린 흔적을 더듬으며 우다가와 카페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좋아하는 국도 246을 걸어 극장에 간다. 잘 때나 깨있을 때나. 寝ても覚めても。


#6

알 수 없는 우연에 바보같이 착각하고 다치기도 여러 번. 그저 제목이 끌려 본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잘 때도 깨있을 때도’를 보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전날밤 잠을 포기한 탓에 초반을 졸았지만 영화의 공기가 느껴졌고, 이건 어김없는 내 이야기였다. 불현듯 찾아오는 알 수 없는, 보이지 않은 충격을 영화는 사람과 사랑으로 얘기한다. 오래 전 열흘간 이미지포럼 작은 쪽방 사무실에서 하루 네닷편의 영화를 보았던 나는 지난 2년의 시간을 그냥 가만히 안고 있었다. 알 수 없은 것들과의 화해, 모른 척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게 살아가는 거. 이미지포럼 뒷편엔 흡연실이 딸린 편의점이 있고, 나는 그곳에서 남은 눈물을 몰래 흘렸다. 자고 있거나 깨있거나 꿈이거나 현실이거나. 


#7

엄선된 책과 가장 작은 책. 아오야마 북 센터가 옷을 갈아입은 유료 서점 분키츠(文喫)와 나카메구로의 sunny boy books와 only free paper. 분키츠는 책과의 만남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작은 소리를 주워담는 뒷골목 고작 두 평 남짓한 책방이 마음에 남는다. 누군가는 츠타야 다이칸야마를 두고 ‘잘난 척에 취해있다’고 말했었지. 뒷골목 책방에서 나는 이랑의 ‘슬프지만 멋진 사람’을 샀다. 


#8

모른 척 멋대로 온 도쿄는 분에 넘쳤는지 차고 넘쳐 삐져나온 수트 케이스의 잠바처럼 며칠을 보냈다. 편의점에서 odol의 티켓을 찾고 웃었던 게 고작 몇 시간 전인데, 공연장 앞에서 난 집과 엄마, 곰돌이와 누나들을 생각했다. 그저 나쁘지 않다 말하며 듣기 시작한 오도루는 왜인지 이따금 나와 닮은 듯 들려왔고, 두 시간을 꽉 채운 라이브에서 나는 또 펑펑 울고 싶었다. 음원으론 느끼지 못했던 떨림, 단정한 세계를 찢고 나오는 미조베 료의 우울과 고독에 나는 미치도록 슬프고 아파서 행복했다. 마치 지난 아침 영화 ‘寝ても覚めても’를 봤을 때처럼, 우연처럼 찾아온 혼자만의 기적은 나를 또 다시 착각하게 한다. 다시 틀리고 주눅들더라도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바보가 되더라고 후회하지 않게. 지금은 키치죠지, WWW엔 데이비드 린치가 파리에 만든 실렌시오를 떠올리게 하는 흡연실이 있다. 


#9

도쿄의 이런저런 조각들. 초봄과 한겨울을 오가는 날씨에 된통 감기에 걸리고 1500엔이나 하는 감기약을 약국에서 사고 구멍 난 시간을 조금은 좁히고 싶어 키치죠지와 미타카, 긴자를 돌아 시부야에 있다. 호텔이 눈앞인데 왜인지 엉덩이는 떨어지지 않고 약은 제법 값을 한다. 무언가를 쓰고 싶었지만 해는 꽤나 짧아져 주문한 하이볼을 몇 모금 마시지못했다. 걸음을 재촉하고, 뒤늦은 저녁을 먹고, 노스탤지아와 멜랑꼴리에서 일어나고. 오늘은 왜인지 햇살이 그림같고, 나는 껴입은 외투를 하나 벗어야겠다. 무언가가 숨겨버린 알 수 없는 기억들이 오늘은 애처롭고 예뻐보인다. 


#10

이노카시라 공원 입구의 스타벅스가 좋다. 공원으로 향하는 작은 골목길에 아담한 테라스를 품고 있은 그곳은 어느 자리에 앉아도 푸근함이 느껴진다. 마치 공원 숲에 안기기라도 한 듯 그곳에서 나는 거짓말처럼 착한 사람이 되고, 일본의 모범적인 접객이 아닌, 편안함에서 배어나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이, 어쩌면 그곳엔 있다. 오래 전 좋아했던 포피 시드 파운드 케이크를 물으니 점원은 ‘계절 한정이지만, 어쩌면 3월에 나올 수도 있어요’라며 웃고, 샌드위치와 그란데 카푸치노를 시킨 나는 한국에서 톨을 주문했을 때보다 지갑을 아꼈다. 사람의 시간이 쌓여가는 곳, 머무를 품을 내어주는 곳. 몇 걸음 걸어간 곳엔 에이타와 우에노 주리가 출연했던 드라마의 배경 미용실이 있고, 9년 전 나는 그 오렌지 색 간판에 쓸모 없이 기뻐했다. 


#11

올해 여름 문을 닫았던 아오야마 북센터는 입장료를 받는 서점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롯뽄기 대로변에 위치한 '분끼츠(文喫)'는 1500엔을 내고 뱃지를 구매해야 입장할 수 있다. 입구엔 호기심을 열어준다는 의미로 백 여 권의 잡지가 진열되어 있고, 뱃지를 단 사람들은 이곳의 책을 마음껏 보고 구입할 수 있다. '서점'에서 하야시라이스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사카이, 언더커버, 레이 카와쿠보의 백과사전만한 책을 골라 테이블에 놓았다. 하야시라이스 자리를 위해 책을 한쪽으로 정돈하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총 다섯 곳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지만 사실 한 공간의 여기저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렇게 남다른 구분은 아니고, 1500엔을 주고 볼 수 있는 책은 3만 권이라 해도 사실 그리 많지는 않다. 아마도 10여 년 전 나는 이곳이 아닌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도쿄필름페스티벌 취재 차 선배가 도쿄에 왔고, 선배의 호텔은 록뽄기에 있었고, 나는 빈 시간을 떼우기 위해 아오야마 북센터의 이런 저런 책을 구경했다. 아마도 그 때 보았던 책은 여기에 없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나이를 먹었고, 책방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책방이 문을 열고 있지만, 내게 '분끼츠'가 만든 '엄선실'이란 이름은 자신과 닮은 것들의 둥지같은 애뜻한 방처럼 느껴졌다. 소외와 외로움을 각오한 자리, 나의 책이지만 너의 책은 아닐 수 있는 것들, 누군가에겐 책을 만끽하는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겐 입에서 살살 녹는 하야시라이스가 오롯이 남는 시간. '분끼츠'엔 '보그'와 '바자'는 없지만 철도 매니아 잡지 '철도인(鉄道人)'이 있고, 이곳의 아트 코너는 고작 책장 한 줄이다. 도서 검색대를 놓지 않으며 '책과의 만남'을 유도하는 '분끼츠'의 의도는 그러니까 절반만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 이곳에서 나는 나와 닮은 책을 만나지 못했지만, 꿈꿔오던 하야시라이스를 만났다. '나와 닮은 것들', 이 말의 절반은 차가운 겨울 바람을 닮았다.


#12

'小さいながらも確かのこと', '작으면서 확실한 것'. JR을 타고 에비스 역에 내려 이 말을 생각하며 한참을 걸었다. 도쿄도사진미술관은 검색을 하면 에비스 역 바로 근처인 것처럼 나오지만, 역과 미술관을 연결하는 '스카이 워크'는 이름만큼 멀고도 멀게 느껴진다. 밤색 패딩을 입은 남자가 지나칠 때 문장을 한 번 떠올렸고, 유모차를 끌고있는 여자가 뒤를 돌아볼 때 시선을 피하며 문장의 꼬리를 감췄다. 나는 작으면서 단단하게 느껴지는, 결코 길지 않은 이 문장의 질감이 그냥 좋았다. 창에 비친 햇살 속에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닌 기묘한 사진(Intimacy)으로 모리 에이키를 알고, 그가 방 문을 열고 나온 듯 다수의 가족을 만나 일궈낸 'Family Re-gained' 에 묘한 흥분을 느끼고, 지금 일본에 자리하는 작고 작은 풍경을 바라본다. 결코 여기에 자리하지 못하는, 기껏 빨간 그늘 아래서야 식탁에 둘러앉는 4인 가족의 애절함, 어둠과 어둠을 걸으면 탁한 현실 어딘가에 겨우 내려앉는 작고 가려린 빛(미야기 후토시, 'Kawasaki'), 보이지 않는 내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 자리하는, 그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바라본다. 그러고보니 내가 마음을 기댔던 말들은 무수히 많고, 나는 그렇게 많은 눈물을 닦았고, 다시 한 번 또 하나의 문장에 마음이 울컥인다. 작아서 애절하고, 작아서 간절하고, 작아서 절실하다. 역을 향해 같은 길을 다시 한번 걸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냥 뒤를 돌아보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닌, 그저 작고 확실한 곳을. 小さいながらも確かなこと。시간이 멜랑꼴리하게 흘러간다. 

eiki mori 'family re-gained' futishi miyagi 'kawasaki'

https://www.youtube.com/watch?v=XWuoikhJq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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