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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19. 2019

시의 해방, 말의 풍경

내가 되기 직전 우리는.


'당신 자신이 불쌍하다 생각하는 당신 자신을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동안 당신은 분명 세계를 미워해도 된다.' 이시이 유야 감독의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생경하게 출발한다. 짙은 어둠 속 바다 위로 펄럭이는 일장기를 뒤로 들려오는 건 좀처럼 잡히지 않는 말과 말.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밤 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밀도의 파랑이다'의 첫 장을 그대로 옮겨온 이 장면은 영화가 담고있는 외로움, 우리가 모르던 외로움 그대로를 비춰낸다. 단 하나의 은유와 상징도 없이 영화는, 시는 차가운 도심 속 외로운 너와 내가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느껴지는 무언가. 사이하테 타히는 말의 의미를 벗겨낸다. 시간과 관계와 경험이 쌓아놓은 말의 외피를 거부하고, 단 하나의 말, 혼자가 되어 너와 나를 부유한다. 그녀는 지난 몇 년간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한 명이고, 출판 불황과 시의 종말을 얘기하는 이 시대에 그녀의 세 번째 시집 '죽어버리고 마는 류의 우리에게(死んでしまう系のぼくらに)'는 3만부 이상이 팔렸다. 그녀의 시는 쇼핑몰 계단에 쓰여지고, 백화점 카달로그에 적히고, 패션지 어느 페이지에, 모델의 목소리를 빌려 소리로 울려퍼진다. 사이하테 타히의 시가 전시가 된다고 할 때, 이는 지루한 벽면에 글자가 되지 않는다. 요코하마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사이하테 타히: 시의 전시'는 모빌 형태의 인스톨레이션 작품이다. 책에서 해방된 듯, 문장에서 도망친 듯 말들은 의미를 벗고 전시장 너와 나의 움직임에 흔들린다. 오롯이 말이 되어, 오롯이 말로 남아 너와 나를 물들인다. 인터넷과 SNS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인의 말들이 보이지도 않는 머나먼 시간을 바라보는 아이러니의 아름다움이란. 역시나 그녀의 전시 타이틀은 길고도 오묘해, '얼음이 되기 직전, 빙하점 아래 물은/ 나비가 되기 직전, 번데기 안은/ 시가 되기 직전, 요코하마 미술관은. 어쩌면 이건 모두 '직전의 나와 너'를 바라보기 위한 사랑의 말들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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