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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06. 2019

이제야 보이는 날

내일은, 잊고있던 것들을 떠올리고 찾아가는 미래일지 모른다.


어떤 영화들은 살아가는 문턱문턱 나의 편이 되어준다. ‘풀잎들’의 기주봉은 연기하는 창수였고, ‘강변호텔’에서 기주봉은 시를 쓰는 영환이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창수는 곧 영환이고, 기주봉은 어제를 차곡차곡 밟아온 시간의 내일처럼 느껴진다. 눈이 내린 이상한 강변에서 고작 며칠의 이야기를 한달 남짓에 찍어낸 영화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홍상수 여정의 기이할정도로 아름다운 죽음의 그림이다. 하늘과 땅이 뒤섞이고, 숨어있던 하늘이 눈이 되어 내리던 날, 수상한 행방불명과 아리송한 여자 둘의 풍경은 어쩌면 홍상수 영화가 찾은 비극의 해피엔딩일지 모른다. 마지막 엔딩에 이르기까지 영화가 거니는 소멸과 삶의 흔적은 고작 방 하나 건너 있거나 창 밖 바로 너머 자리하고 있다. 매우 파격적이고 절대적인 눈물. 보지 않거나 보지 못했거나. 이 영화의 엔딩은 꼭 엔딩이어야만 했다. 



혼자있는 날이 많다보니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게 사건처럼 느껴진다. 그저그런 어제와 오늘이 아닌 만들고, 기다리고, 마주하는 오늘날. 단골 카페에서 한참을 떠들고 버스를 타고가다 문득 그런 나를 생각했다. 분명 혼자일 때와 어딘가 다른 나. 영상자료원에 가면 영화와 나만 있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조금좋아지는데, 그곳에서 8년 전 제제 타카히사의 영화 ‘고독사’를 보았다. 독거 노인의 마지막을 예상했던 영화의 주인공은 당시 스물 셋의 오카다 마사키. 노인이지 않아도 죽을 때 혼자인 건 마찬가지이고, 혼자일 때 외로움을 느끼는 건, 그 시간이 죽음을 닮아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는 건 참 창피하고 쪽팔리고, 미안하지만, 미츠메의 음악을 듣다보면 그냥 다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들려온다. 금새 홀려버린 물결같은 날들. なめらかな日々。영화는 신파로 빠지며 조금 촌스럽게 끝나지만, 나는 혼자였던 날들의 물결같은 사건사고를 떠올렸다. 이미 몇 번 죽었을지도 모를 날의 프렌치 토스트와 차가운 아메리카노. 누군가가 홀로 죽은 쓸쓸한 방은 그 누군가가 살아왔던 방이기도 하다. 


https://youtu.be/BOee1izsBdc


‘강변 호텔’을 보고 온 날은 이상하게 맘이 편안했다. 무슨 승리를 하고 온 것처럼 나도 모를 여유가 여기저기 꿈틀댄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일상인데 매번 느끼는 일상이다. 병원에 가는 날이면 아직도 긴장을 하고, 의사 선생님 앞에선 조금 착한 사람이 되고만다. 고작 82분짜리 영화 한 편을 보겠다고 용산까지 갔고, 여태 몰랐던 사라짐에 한참을 울먹이며 집에 돌아왔다. ‘파도치는 땅’이란 이름의 영화.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국가 폭력이란 촌스런 이야기의 영화. 하지만 단 한 장면. 아빠가 죽었을 때 난 택시를 타지 않았고, 흔히 말하는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고, 왜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묵직하고 조금도 성급하지 않은 리듬으로 아픔을 그저 바라보는 영화는 몰랐던 나의 묵은 상처를 들춰냈다. 폭력도, 아픔도, 상처도 삶이 되어 살아가는 시간에, 나는 허무하게 과거가 되버리는 시간에 목이 메었다. 10년이 넘게 지나 이제서야 아빠와의 이별이 슬프다. 12시가 다 돼 일어나 늦은 아침을 점심인냥 먹고, 일상이 된 유튜브엔 왜인지 네 살짜리 네이선 챈의 스케이팅 영상이 있고, 나라 요시토모가 자신의 친구 작품을 자랑하듯 올린 고양이 사진은 묘한 애틋함을 풍긴다. 기다리던 미츠메의 새 앨범은 드디어 오늘 전곡이 공개됐다. 내가 이렇게나 슬픈 걸 보니 나이를 정말 먹었구나 싶고, 세상엔 얄밉게도 타인의 죽음만이 존재하고,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바라본다. 



연호가 바뀌는 일본의 풍경을 보고 그냥 뭉클했다. 우리로 따지면 영조, 정조,  순조 이후 찾아오는 또 하나의 이름을 맞이하는, 꽤나 고리타분한 오래된 풍습일 뿐이지만, 기어코 지나감을 잊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는 시간은 나라를 떠나, 국적을 떠나 아름다웠다. 신바시(新橋) 역 일대엔 신문의 호외를 받기위해 아우성치는 소란이 일었고,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대형 스크린 앞에는 젊은 남녀들이 새로운 연호 발표에 환호성을 질렀다. 월드컵과도, 할로윈과도, 크리스마스 이브와도 색다른 도시의 이상한 흥분. 시대착오적인 이 풍경은 어김없이 인간이 품은 감동 중 하나이다. 국내 포털 댓글에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대'라는 비아냥이 있고, 일본의 연호는 어찌할 수 없이 침략과 식민의 역사에서 태어난 이름이지만, 30여 년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일본의 여기저기에선 그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아무런 근거 없는 막연한 희망이 꿈틀댄다. 새로운 시대의 이름, 레이와(令和)가 시작되는 5월 1일에 맞춰 2019년의 달력이 다시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연호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도장을 만드는 가게엔 새로 인감을 파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새로움이란 이름의 이상한 희망. 하루하루, 달라지는 그 희망에 모두의 역사는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각자의 수많은 역사가 각자의 자리에서 숨을 쉰다. 외래어를 표기하는 카타카나엔 도무지 영어로도, 독어로도, 불어로도 소통되지 못하는 발음이 수두룩하지만, 그 안엔 타자를 향한 새로움의 시선이 자리한다. 일본판 'WIRED'가 새 시대를 맞아 ヴ 대신 ヷ, ヸ, ヹ, ヺ를 사용하겠다는 발표 기사를 보고, 서로가 서로의 언어로 소통하는 이상하게 뭉클한 시대를 생각했다. ヷ, ヸ, ヹ, ヺ는 외계어처럼 보이지만 메이지, 다이쇼 지대부터 사용됐다. 내일이란 함은, 잊고있던 것들을 떠올리고 찾아가는 미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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