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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30. 2019

우울의 밑바닥에서 곤니찌와

택배가 도착한 날, 눈물을 닦았다.



*아마도 1년 전 적었던 글, 다시 마주하니 너무 낯설어 다시 남기는 글입니다. 지난 나에게서 느겨지는 낯섦. 어쩌면 내일의 예고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꽤나 고르며 살았다. 평범한 건 싫었고 흔한 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옷도, 가방도, 신발도, 화장품도 모두 그랬다. 직업 특성 상 나날이 높아지는 눈의 탓도 있기는 하지만 튀는 건 싫어해도 지루한 건 더 싫어하는 게 타고난 성미다. 그렇게 꼼 데 갸르송을 입었고, 에이솝과 SK2를 발랐으며, 프란시스 커졍을 뿌리고 릭 오웬스와 요지 야마모토의 것들을 사댔다. 하지만 3번의 입원을 하고 3번의 퇴원을 하며 사소한 취향 조차 어느 하나 돈이 아닌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많은 게 사라진 방 안엔 삭제된 취향의 자리가 선연했고, 지워진 시간의 자리엔 낯선 감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렇게 살았다. 고르고 고르며 살았던 10년을 뒤로 아무런 색도, 아무런 향기도 없는 세계에서 그랬다. 내게 취향을 얘기할 자격은 없었다. 문득 스친 서른일곱이란 숫자는 한숨과 한숨을 불렀고, 자신을 탓하지 말자며 다짐했던 날의 기억은 식기도 전에 눈물을 떨궜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었다. 생각을 구슬려 마음을 붙잡으려 하지만 좀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제자리라 생각했는데 역전 당해있었다. 원점이라 생각했는데 뒤쳐져 있었다. 모른 척 살았던 날들이 사무치게 아파왔다. 택배가 도착한 날, 눈물을 닦았다.

 Yoshitomo Nara, Eiki Mori

에이솝과 무인양품, SK2와 에이솝. 포장을 뜯으며 설렜던 마음이 무색하게 좋아야 할 기분이 바닥을 쳤다. 다시 되찾았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간 시간이 더 아파왔고 흘러간 것들이 더 괴로웠다. 상실이 슬퍼서가 아니다. 그런 식의 우울은 이제 내성이 생겼다. 어떤 덧없음, 어떤 허무, 어떤 맥빠진 감정이 마음 한켠에 남았다. SK2와 에이솝의 시간엔 실수와 실패, 좌절도 함께였고, 취향의 자리엔 보이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그 못난 시간을 나는 아직도 어찌하지 못한다. 받아들인다는 게, 지금의 나를 인정한다는 게, 그런 시간을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알 수 없이 모든 게 꺾여지곤 한다. 사라지고, 멀어지고, 뒤틀리고, 꼬인 시간을 여전히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무슨 화장품을 살까 고민하고, 무슨 옷을 입고 외출할까 생각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한다. 현실은 무인양품이어도 에이솝을 구매한다. 20개 5천원짜리 초를 켜놓고 글을 쓰며 기억보다 꿈을 떠올린다. 실패가 담긴 출발선에서, 좌절이 지나간 트랙에서, 아물길 기다리는 상처를 바라보며. 취향이 구원하는 시간도 있다고 믿으며.

새벽 잠을 잃었다. 여섯 시면 눈이 떠지는 게 꼭 1년 전의 어느 새벽으로 돌아간 듯하다. 화장실에 갔다 곰돌이 약을 준비하고 강아지 화장실과 물을 갈아준 뒤 밥을 먹는다. 항상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과 국을 먹는데 어제와 오늘은 빵과 커피를 먹고 마셨다. 혼자 살던 1년 전처럼. 별 거 아닌 조금 다른 하루. 지금도 그 때도, 그 때도 지금도 아닌 어쩌면 그냥 어떤 아침의 하루. 약을 쏟고 말았다. 약통에 스푼을 넣어두는데 뚜껑이 좀처럼 닫히지 않았다. 무리하게 닫았고, 다시 열다가 약 가루를 쏟고 말았다. 한숨이 나왔다. 억장이 무너졌다. 누나가 떨어지기 바쁘게 사다놓는 약을 쏟아서였는지, 아침부터 무언가 어긋나는 듯한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그랬다. 이럴 때 나는 어찌할 수 없이 진부한 실패의 드라마에 떨어지고 만다. 엄마가 다가오셨다. 왜 그러냐고, 괜찮아다고 하셨다. 마음이 무너졌다. 무겁게 짓누르던 시간이 녹는듯 사라졌다. 괜찮을 것 같은 눈물이 흘렀다. 37이란 숫자도, 서른일곱이란 시간도, 마흔의 목전이란 지금도, 좌절이 지나간 트랙도. 커피와 빵을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비관했던 시간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지금을 떠올렸고, 실망에 가려진 시간들을 생각하며 다음을 떠올렸다. 셋째 누나가 오키나와에서 사온 커피는 일본에서 '브랜드'라 말하면 나오는 커피처럼 구수하고 스모키했고, 둘째 누나가 병원 빵집에서 사온 파운드 케잌과 커스타드 크림 빵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하루가 기지개를 켜는 시간, 그건 괜찮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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