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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01. 2018

끝나지 않는 엔드롤, 개와의 시간

평생 강아지일 줄 알았지만 곰돌이는 어느새 열여섯 개가 되었다.


세상엔 어쩌면 개의 시간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다. 회사를 나오고 1년 반, 일상을 구성하는 많은 게 달라졌다. 출퇴근이 사라진 시간은 거의 새하얀 도화지와 같아 꽤 오랜 시간을 공허하게 지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빵을 배우고, 종종 일을 하긴 했지만 어딘가 구멍이 뚫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마도 10여 년 샐러리맨의 후유증이었겠지만 꽤나 힘들었던 시간을 기억한다. 올해로 열여섯이 된 강아지 곰돌이의 시간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진 건 아마 이 공백의 여운 덕택이다. 빈 자리가 생기고 나서야 비로서 바쁜 일상에 보이지 않던 개의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기적이게도 그랬다. 새벽 잠을 잃어 여섯 시쯤 일어난 날, 곰돌이의 약을 준비한다. 아침에만 먹는 약이 다섯 종류인데 약의 정식 명칭과 상관 없이 우리만의 이름이 붙어있다. 뭉치기, 샌드위치, 쵸콜릿(개의 금기임에도), 통통이 등. 각각 신장, 간, 눈, 피부, 관절 등에 좋은 약이다. 이 모든 걸 다 준비하려면 최소 5분은 소요된다. 이전엔 없던 시간이다. 곰돌이는 편식이 심한 편이다. 어릴 땐 통통이를 무엇보다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통통이를 먹이려면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반면 쿰쿰한 냄새가 나는 껌은 냉장고 문만 열어도 혀를 내밀고 입맛을 다시곤 한다. 식욕은 줄고, 잠은 늘고, 편식은 심해지고, 성격은 다소 고약해지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나이 탓일 것이다. 두 세 그릇을 뚝딱하던 날들은 이미 오래 전이 되었고, 한 그릇을 먹이기 위해서도 사료를 물에 말아 간식을, 껌을 잘게 썰어 넣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개도 입맛이 변하고, 개도 성격이 변하며, 개도 나이를 먹는다. 평생 강아지일 줄 알았지만 곰돌이는 어느새 열여섯 개가 되었다. 개의 시간은 어찌할 수 없는 애절함으로 흐른다.  



곰돌이가 오지 않았다. 아침이면 늦어도 여섯 시쯤 방문을 두드려 침대에 올려달라 조르던 곰돌이가 오지 않았다. 깼다가 팔 베개를 해주며 다시 한번 잠에 드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요즘 그런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잠이 많아진 곰돌이는 깨우지 않으면 일어날 줄 모르고 설령 다가와 곁에 눕더라도 팔 밑이 아닌 다리 언저리에서 혼자 외롭게 다시 자곤 한다. 이미 곰돌이는 강아지가 아님을 쓰디쓰게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곰돌이와의 시간이 소중하다. 이기적이게도 이제야, 16년이나 지나서야 새삼 깨닫는다. 애교라고 생각했던 얄밉게 내민 혀는 이제 노화의 증상이 되었고, 냄새가 나봤자 구수한 숭늉 냄새였던 것이 이제는 역시 노화의 증세일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잘 먹지 않아 구토하는 날이 종종 있고, 잘만 뛰어 오르던 소파와 침대도 이제는 계단 없이 힘들어졌다. 어릴 때부터 쓸개골 탈구라 다리를 절뚝거리는 일이 왕왕 있고, 심지어 치매에 걸려 약 없이는 밤잠을 설치곤 한다. 잠을 이루지 못해 거실과 방을 서성이는 곰돌이를 보고 있으면 흘러간 시간이 애달프기만 하다. 하지만 곰돌이는 아직 활기차다. 누군가 초인종만 눌러도 집을 지키려 힘차게 짖어대고, 껌이나 간식, 그리고 산책이란 말을 들으면 꼬리를 흔들며 웃곤 한다. 엄마와 둘째 누나(가 곰돌이의 거의 모든 것을 사대고 있다)를 유독 좋아해 엄마와 누나가 외출하면 꽁지(곰돌의 꼬리)를 내린 채 현관만 바라보고, 엄마와 누나가 집에 돌아오면 애교를 발산하며 반긴다. 꽁지는 언제 그랬는지 어느새 올라가있다. 이 모든 게 애절하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얼마 전 곰돌이의 집을 빨았다. 핑크 색의 뽀글뽀글한 털로 만들어져 뽀글이라 불리는 집이다. 새 집을 주문했지만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물에 젖은 뽀글이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곰돌이는 하루 반나절을 집 없이 살았다. 그런데 집이 다 말랐는데도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냄새가 사라져서, 없어져서, 그러니까 자기 집 같지 안아서 그랬다. 집이 소파 아래 있어 디딤돌로 밟고 올라가던 걸 무리하게 오르려다 다칠 뻔도 했고, 곰돌의 체취가 묻은 담요를 집에 넣어주어도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강아지를 맞이하며 ‘어느 날 강아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어느날 우리가 강아지에게 다가갔다’는 말이기도 하다. 곰돌의 시간을 무시했음에 뜨끔했다. 뽀글이를 세탁기에 집어넣었던 누나는 머쓱해했다. 다음 날 곰돌이의 회색 뽀글이가 도착했고 곰돌이는 조금의 적응 시간을 거쳐 뽀글이에 안착했다. 개와 함께 산다는 건 개의 시간을, 리듬을, 방식을 존중하는 것일 것이다. 16년의 시간을 세탁기에 돌려버렸던 실수를 반성하며 곰돌과의 시간을 생각한다. 마냥 강아지일 줄 알았던 시절의 놓치고, 간과하고, 그저 흘려버렸던 순간들을 애써 되새기려 노력한다. 어쩌면 지금 느낀 곰돌이의 감촉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애절함으로, 어쩌면 코미디언을 능가하는 지금 곰돌이의 개그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애달픔으로 곰돌과의 시간을 이어간다. 이제서야 곰돌이의 시간을 살아간다. 



개로 기억되는 시간이 있다. 순간과 순간으로 흐르는 이 시간은 장면과 장면으로 이어진다. 강아지 곰돌이와 살 때 장면은 머무르지 않았다. 그저 다음과 다음으로, 장면과 장면으로 흘러가기 바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애교를 선보였고, 웃음은 넘치고 넘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곰돌이가 열여섯이 된 지금, 그러니까 개가 된 곰돌이와 살고있는 지금, 장면은 진득하게 머물러 여운을 남긴다. 그러기 위해 애쓰고, 다짐하고, 노력한다. 곰돌이와의 순간을 기억한다. 엄마가 어디라도 앉으면 어느새 다가와 무릎에 둥지를 트는 곰돌, 절대 바닥에 앉지 않고 방석, 혹은 따뜻하고 포근한 곳을 찾아 앉는 곰돌, 남자 아이임에도 여자가 많은 집에서 자란 탓인지 원피스 모양의 수세미를 보고 좋아서 흥분하고, 세탁물에 자신의 옷이 있으면 어느새 뛰어와 코를 킁킁거리는 곰돌, 둘째 누나가 집에 오면 삼종 세트(귀 청소, 세수, 양치)를 할까봐 도망가고, 자신의 물건이 들어있는 서랍을 열기라도 하면 다가와 안을 들여다보는 곰돌, 몰래 준 빵을 받아먹고 ‘비밀이야’라 말하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가장 좋아하는 껌을 주면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어디서 먹을지 고민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곰돌, 전자렌지 작동하는 소리만 들려도 간식 주는 줄 알고 쫓아와 똘망똘망 눈방울을 굴리고, 고작 문지방임에도 점프를 하며 웃음을 선사하는 곰돌, 엄마가 ‘베란다에 고구마 좀 가져와라’를 ‘베란다에 곰돌이 좀 가져와라’라고 말하면서 고구마란 애칭을 얻은 곰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이 순간들을 간직한다. 개의 시간이 지나간, 개의 발자국이 남은 지금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의 흔적이다. 


개와 고양이는 사람과 다른 시간을 산다고 한다. 사람보다 여덟 배 빠른 시간을 산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니 애초에 개와 사람은 서로에게 애절한 존재다. 이별이 전제된 시간, 헤어짐이 예고된 삶. 아라키 노부요시가 자신의 애묘 치로와의 22년을 담은 사진집의 제목은 ‘愛しのチロ’였다. ‘사랑하는 치로(愛するチロ)’와 비슷해 보이지만 어딘가 어색한 단어의 조합은 실은 사랑과 죽음을 함께 쓴 ‘愛死のチロ’다. 제목부터 애달프다. 고양이의 22살은 사람의 100살이라고 한다. 그만큼 개와 고양이는 보다 빠른 시간을 산다. 간직하고 싶어도 달아나고, 기억하고 싶어도 흘러가는 게 개와 고양이의 시간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한 시간은 그들에게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저 소망할 수 밖에 없다. 온전히 개의 시간을 살 순 없겠지만 나이 든, 열 여섯이 된 곰돌과 시간을 보내며 지금이 아닌 어딘가의 시간을 생각한다. 끝나지 않는 엔드롤을,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엔드롤을 희망한다. 그런 시간의 세상을 꿈꿔본다. 그곳에 흐르는 시간을 애써 살아보려는 노력이 지금 여기에 흐르는 시간의 최선이다. 항상 촉촉한 코와 바짝 올라간 꼬리에 안심을 해도 소파의 구석구석을 핥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혹시 이게 이제 그 때가 왔다는 건가’ 싶은 마음에 불안해지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발걸음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요즘. 개가 된 강아지 곰돌이는 내게 몰랐던 시간의 세계를 일깨워준다. 개와의 시간을 산다는 것,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찾아오는 이별의 아름다운 아픔과 애절하게 흘러내리는 시간의 따뜻한 눈물. 곰돌이의 엔드롤은 끝나지 않았다. 


*'바자' 5월호에 게재된 글의 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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