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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28. 2017

홍상수 영화 속 김민희, 그 후

삶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모른다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뒤에 홀로 떨어져 있는 '혼자'에 신경이 쓰였다. 동시에 망망하고 싸늘한 겨울 바다를 걷는 여인이 떠올랐다. 홍상수 감독의 열 아홉번째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이전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지금까지의 영화가 우연과 반복을 통해 말로 뭐라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넌지시 드러냈다면 이번엔 인물로 하여금 그 무언가를 찾게 한다. 주변의 것들, 기호를 묘사하며 무언가를 환기시켰던 것과 달리 이번엔 인물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영희(김민희)다.


영희는 지금 함부르크에 있다. 유부남 영화감독과의 연애를 끝내고 마음을 정리하러 언니 지영(서영희)의 집에 왔다. 영희는 "여기 너무 좋다"라고 얘기하고, 지영은 영희에게 "너 매력적이야"라고 칭찬한다. 그리고 둘은 서점, 공원을 돌며 산책을 한다. 또 이어 초대를 받아 지영의 지인의 집에 간다. 여기까지가 1부의 스토리다. 별 게 없다. 하지만 둘이 산책을 하러 가는 도중 한 한국 남자가 큰 소리로 말을 건다. "저기요, 저기. 지금 몇 시에요?" 역시나 별 거 없다. 하지만 이 대사는 묘하게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말로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드뤼어지는 기분이다.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가 흐른다. 그리고 이 기분은 2부의 창문 닦는 남자로 반복된다.  


2부는 1부보다 길다. 내용도 더 많다. 친구를 만나러 강릉에 간 영희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우연히 선배인 천우(권해요)를 만난다. 천우는 영희에게 "너 달라졌다. 성숙해졌어"라고 얘기하고, 영희는 "여기 좋은 거 같아요"라고 말한다. 1부의 영희와 지영의 대화가 반복되는 것이다. 둘은 근처 커피숍 봉봉 방앗간에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천우가 또 다른 선배인 명수(정재영)을 부른다. 이후의 내용은 이들이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중엔 유부남 영화감독 상원(문성근), 그리고 그의 스태프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도 포함된다. 여기서 영화의 많은 게 드러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술자리는 중요하다. 상원은 어린이용 뮤지컬 작곡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주 단순한 거지만, 깊이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거야." 우리가 하는 사랑이, 사는 삶이 실은 피상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사다.


영화에서 홍상수 감독은 영희를 홀로 있게 내버려둔다. 지영과 함께 산책을 해도, 천우, 명수, 준희(송선미), 승희(안재홍) 등과 술을 마셔도 그녀는 혼자 싸우고 있다. 영희는 사랑의 자격을 논하며 열을 올리는데 이 장면이 압권이다. "다 쓰레기"라고, 진실한 사랑은 없다"고, "아무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울먹이며 소리지른다. 자신의 실패한 사랑과 이에 반응하는 주변 사람들을 거치며 그녀는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찾아 애쓴다. 마치 사랑을 고뇌하는 수행자의 모습같다. 삶이 무언지 모른다. 사랑도 무언지 모른다. 하지만 영희는 수많은 피상적인 것들, 그리고 '가짜'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다짐해보고 싶었어.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나답게 사는 거야. 흔들리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답게 살기로 했어." 영희의 대사다.


영화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남자 셋이 등장한다. 하나는 영희와 지영의 산책길을 방해하는 검은 옷의 남자고, 또 하나는 함부르크 바다를 걷던 영희를 둘러업고 가는 남자, 그리고 또 하나는 영희가 묵는 호텔의 창을 연신 닦고 있는 검은 옷의 남자다. 마치 현실에 없는 어떤 초월적인 곳에서 내려온 것 같은 세 남자는 너무나 이질적이라 영희가 찾는 '진짜', 알맹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특히 관객의 눈엔 보이지만 영희, 천후, 준희에 눈엔 보이지 않게 설정된 창문 닦는 남자 신은 그 '진짜', 알맹이가 우리 곁에 있지만 쉽게 닿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엄숙한 장면들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화의 후반부 상원은 영희에게 줄 책이 있다며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의 한 구절을 읽는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일상적인 것보다 고상한 그 무언가를 위해 우리는 궁금해하고, 의심하며 희망을 한다. 그리고 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는 어떠한 알맹이거나 기운일 것이다. 영화는 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열심히 묻고 생각하는 영희를 통해 사랑과 삶의 껍질을 조금씩 벗겨내 보인다. 아마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알맹이고 기운이겠지만 영화에는 그 알맹이와 기운의 자장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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