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감을 기억하는 자리에, 잡지의 시간을 느낀다
사회적 거리 두기. 일본에선 不要不急, 급하거나 필요하지 않으면 나오지 말자는, 그러니까 집에 있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출퇴근이 없는 소위 나와 같은 사람은 오늘도 고작 1천 걸음을 조금 더 걷는다. 밥이야 엄마가 매일 차려주시고, 웬만한 먹을 거리는 없지 않을 만큼 있고, 커피는 인터넷으로 일리가 1+1이라 두 통이나 사놨는데, 이렇게나 마음이 내 맘같지 않은 건, 일상이란 분명 의식주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불매운동으로 언제가 될지 모를 책의 원고는 넘겨는 두었지만, 시작하는 글을 써야할 것 같은데 지금 쓰는 게 맞는지 조금 더 살펴봐야 하는지, 밀려두었던 과제가 되어버린 지난 인터뷰들을 정리하다 어딘가 비어버린 못난 마음에 그나마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춘다. 이미 4월도 중순이 지나가는데, 4월호 '뽀빠이'랄지, 릭 오웬스를 독점 자택 취재했다는 '스위치'랄지, 아직도 보지 못했고, 쓰고싶은 말들이 쓰여지기까지 왜이리 시간이 길다. 지난 달, '스위치'의 사이토 씨는 내게 메일을 하나 보내주었는데, 아직 답은 오지 않았다.
스위치의 예. 벌써 9년 전. 311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던 무렵, 바로 한 달 전까지 도쿄에 살았던 나는 이곳에서 그 험난한 뉴스를 보고 또 봤지만, 사이토 씨는 당시의 이야기를 몇 줄의 메일로 전해줬다. "인쇄소가 중단되고, 종이 수급이 힘들어지고, 책방들은 잔해를 수습하느라 영업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많은 고민을 했어요. 하지만 잡지가 있어야 할 자리, 작은 부수라도 세상에 내놓는다는 사명이랄까, 그런 프라이드가 있었어요." 프라이드, 잡지가 있어야 할 자리. 이런 문장이 도착했다. 그와 처음으로 메일을 주고받은 건 안자이 미즈루의 일러스트를 위해 취재를 하던 지난 5월 무렵이었고, 그는 릭 오웬스의, 자택 겸 아틀리에를 독점 취재했다는 소식과 함께 뜸했던 메일의 타래를 이어갔다. 반쯤 벗은 릭 오웬스의 앙상한 표지 사진부터 릭 오웬스의 옷을 입고 시간의 축을 이동한 듯한 콜렉션의 화보와 그의 무대 작업과 가구 역시 그로테스크하기 그지 없는 오브제로서의 의자와 책장 등. 311을 겪지 않아 그 때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같은 날들에 이만큼의 팬터지는 삶을 위한 양식이 된다. 사카이의 철제 머그와 일리의 파우더지만 갓 내린 커피 한 잔의 오후라면.
뽀빠이의 예. 뽀빠이는 오래 전 리포트를 발행하며 팔 만큼 파고 종종 즐겨보던 잡지인데, 사실 근래엔 세월의 갭인지, 나이 차인지 점점 멀어졌고, 거의 1년 만에 4월호를 아마죤에서 샀다. 파란 하늘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3:7로 곱게 가다듬은 사회 초년생의 표지. 매년 이 때는 '뽀빠이'가 입시, 입사, 새 출발을 시작하는 이들을 타깃으로 한 권을 몽땅 바치는 시절인데, 이번에도 그건 여지없이 그곳에 있고, 그런 수 백 페이지가 가득하다. 다만 이번엔 그 방점이 헤어스타일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 영화의 예를 들어 헤어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건 오래 전 내가 일하던 잡지에서도 했던 기획이고, Beams의 새로 나온 웨스턴 셔츠를 소개하며 1884년 카우보이의 이야기까지 꺼내는 건 역시나 그들의, 광고같지 않은 광고,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세련됨이지만, 표지를 장식한 모델은 4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아베 타카시란 전 '뽀빠이' 스태프다. 직접 전화를 걸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부터, 6만엔 짜리 루이비통 반팔 티셔츠 차림의 사진, 4년이 다 되어 잡지 뒷편에서 페이지에 데뷔하기까지, 잡지는 아마도 세월의 한 권이다. 일할 땐 소위 어시스트로 왔다 떠나가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고, 겨우 컨트리뷰터 한 쪽에 그들의 이야기가 실리곤 했지만, 떠나감을 기억하는 자리에 일상을 느낀다. 최소한 지금 이 구린 시절보다 우리 일상의 역사가, 몇 만 배는 더 길기 때문에, 이제야 잡지를 다시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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