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Apr 19. 2020

성장을 하는 무렵,
세상은 잠시 그곳에 다녀온다.

오늘이 끝나간다는 건, 어쩌면 하루의 종말이다.



오래된 영화를 본다. 지나간 영화를 이제야 본다는 건 박제된 이야기를 뒤늦게 바라보는 철지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프랑소와 트뤼포의 '쥴 앤 짐'을 다시 보거나, 김보라 감독과 만나고 돌아온 날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을 꺼내보거나, 홍상수의 영화는 늘 다르게 다가오고, 그렇게 영화는 내게 조금 수상한 생물체처럼 살아간다. 지금 상영중인 영화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 시즈오로 출연하는 소메타니 쇼타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데도, 죤 카사베츠의 '러브 스트림'를 보고, 트리포의 '마지막 열차'를 이야기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오차의 맛'과 같은 클래식을 즐겨본다. 그의 인터뷰를 읽던 밤, 나보다 10년이나 뒤를 살아가는 그의 말들이 영화의 언어처럼 들려왔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같은 작품은 당시 세계적으로 전위적이라 얘기되었지만, 물론 그 세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열광했던 젊은 사람들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이기에 바라볼 수 있는 방식이 있다고 늘 느껴요. 본래 과거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라 '과거'의 영화를 보아도, '지금'의 감각으로 아름답다고,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요." 하물며 누군가가 떠나간 날이라도 되면, 그곳에 남아있는 영화는 조금 애잔한 어제처럼 느껴지고 환상의 한 편으로도 다가온다. 오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이 타계한 날, 그의 1983년 작품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꺼내보았다.

2020년 4월 10일, 오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야기가 곳곳에 보였다.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작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타임리프와 텔레포테이션, 시간의 너머를 바라보는 그 영화의 2020년은 그런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매일은 어제와 같고, 오늘은 매번 지루하고, 그렇게 나날이 지겹다고 하지만, 세상에 같은 '오늘'은 어디에도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아사코'에서 그 당연한 일상의 비극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기도 했었다. 2018년 어느 여름의 이야기. 그곳엔 1인 2역을 연기하는 히가시데 마사히로의 료헤이와 바쿠가 있고, 그건 여느 장르물의 별 새롭지 않은 설정이지만,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를 넘나드는, 일상이 아닌 삶의 두 축이 동거하는 기묘한 틈새의 풍경이기도 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주인공 요시야마는 어느 날 이후 남들보다 하루를 먼저 사는 이상한 시간 축에 떨어지고, 영화는 그런 어긋남들,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가 미묘하게 미끄러지며 함께 흘러가는 아슬아슬한 날들을 그린다. 벌써 40년이나 흘러버린 영화는, 세월의 흔적인지, 작품의 의도인지 최소한 지금 이곳에 없는 무드로 펼쳐진다. 2006년 호소다 마루가 애니메이션으로 옮겨냈던 같은 영화의 같은 자리에서, 좀 더 너머의 세계를 바라본다. "이상해보이는 별 하늘. 너무 아름다워 무서워. 분명 저 빛나는 별 어딘가에서 멋진 사람이 찾아올거야." 스키 동아리쯤 되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늦은 밤 산속에서 앳된 얼굴의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속삭이던 한 마디. 하늘은 짙은 흙빛에 세상은 온통 어둠. 이 영화의 초반 첫 시퀀스는 흡사 SF 물의 한 장면처럼도 느껴지는데, 이곳과 저곳, 장르까지 뒤섞어가며 흘러가는 이 영화에서, 내일은 설렘이고, 기대이고, 동시에 불안, 그리고 공포이다. 오늘이 끝나간다는 건, 어쩌면 하루의 종말이다.

2006년, 내가 첫 회사에 들어가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까지 하기 시작하던 무렵,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어느 여름 한 폭의 멜랑꼴리로 가득한 영화였다.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던 소녀 마코토가 돌연 사고를 당한 이후 시간의 혼란을 갖게된 뒤 벌어지는 다소 코믹하기까지 한 좌충우돌의 이야기. 하지만 호소다는 청량한 하늘에서도, 말게 개인 텅빈 운동장에서도, 시간의 여백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다시 한 번 시간을 돌리려 하지만 실패하고 마는 마코토의 어느 여름날은, 길고 긴 일상의 가장 애절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가 사고를 당한 건 7월 13일, 일본어로는 NICE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오오바야시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4월 16일에서 17일, 18일, 그리고 다시 17일에서 19일. 단 4일간의 기억을 담는다. 4월과 7월. 봄의 한복판과 여름의 초입. 여름은 어느새 끝나버리고 말아 아련하게 남는 계절이지만, 4월엔 어딘가 불안의, 날선, 초초와 떨림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오오바야시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4월의 이야기(四月の物語)'이기도 하다. 아마도 가장 불안한 계절에 삐져나오는 이질적인 파편들을 바라보고 있는 영화. 요시오카가 시간에 수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늦은 저녁 지진이 일어난 뒤이지만, 어릴 적 함께 놀다 생겨난 손바닥의 상처랄지, 함께 부르던 노래의 알지 못했던 다음 구절이랄지, 아들 부부를 먼저 떠내보낸 노부부의 일상은 그저 평범하고 평온해보여도 끊겨버린 한 시간축의 단절된 일상이고,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시간의 일상은 간혹 이곳에 데자뷔랄지, 기시감이랄지, 이상한 감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라벤더 꽃향을 맡으며 잠시 묘한 기분에 젖어든다는 건, 어쩌면 그런 다름의 인기척인지 모른다.

시간의 너머를 바라보면서도, 흡사 평행 우주의 기반 위에 흘러가는 듯 싶어도,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성장 영화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날 '언젠가'를 기다리고, 동생과는 작은 말다툼을 하고, 늦잠을 자 서둘러 계단을 내리는 등교길은 요시오카의 대부분의 하루다. 하지만, 늦은 밤 스키를 타러 산에 놀러갔을 때,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 마디. "너무 아름다워서 무서워." 아름답고, 순수하게 기다리고, 애타게 바라는 마음은, 사실 아직 이곳에 없고, 미지의 시간들. 불안과 공포의 자리인지 모른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다 그저 갑자기 부딪힌 동급생 카즈오는 이 영화의 키(key)라 할 수 있는 인물인데, 요시오카는 그를 "있는 것 같은데 없고, 없는 것 같은데 있어"라고 명확히 정의한다. 세상의 이면을 바라보는 영화에서 '성장'이란 잊혀짐의 기록이고, 불안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이고, 그곳엔 죽음도, 헤어짐도, 또 한 번의 망각도 기다리고 있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에 스쳐가는 너머의 자욱들이애처롭고 '아름답다.' 그리고 카즈오의 말대로,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것.' 어쩌면 그런 게 성장의 그림이다. 그저 기술의 모자람이겠지만, 모든 걸 알게된 요시오카가 시간을 넘나들며 지나간 날들을 다시 바라보는 장면에 나는 CG의 낮은 퀄리티같은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다. 오히려 그런 이상함의 울림이 이 영화엔 있다. 칠판에 적어놓는 오늘의 월과 일. 동생과 서로 뜯겠다면 아웅다웅하는 주방의 일력. 4월 16일, 17일, 18일, 다시 17일에서 19일. 이 영화는 그 4일에서 왜인지 영원히 머물 것만 같다. 그저 한 소녀 이야기이지만, 그 세계는 풍만하고, 성장을 하는 무렵, 세상은 잠시 그곳에 다녀온다.  

https://youtu.be/RBSozb8D85g




매거진의 이전글 멀리서 보면 '이토 상', 가까이서 보면 '오또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