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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21. 2020

어느 트라이앵글 우주의  여름 끝자락

비틀즈는 없지만, 이상한 트라이앵글의 새벽이 어른거린다.



하나, 둘, 셋...숫자를 세기 시작해 120까지.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어딘가 이곳에 잘 보이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다. 주인공 '나'는 잠깐 눈길이 스친 여자를 기다리며 의미없는 숫자를 하나씩 더하기 시작하고, 그 사이 여자는 뒤를 돌아 그에게 다가오고, 같은 서점에서 함께 일을 하면서도 둘은 그렇게 만난다. 동거하는 친구 시즈오(소메타니 쇼타)와 숫자 120보다 먼저 도착한 여자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와 에모토 타스쿠가 연기하는 '나'의 조금은 이상한 여름 한 철 스토리. 꼼꼼히 따지고 보면 셋의 그 시절은 때로 복잡하기 그지없지만, 영화는 성가시고, 귀찮고, 번거로운 그런 날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 굳이 묻지 않고, 애써 말하지 않고, 부러 외면하며 세 남녀 사이를 부유하듯 배회한다. 각자의 사정을 품고 있는 '나'와 시즈오와 사치코는 함께있지만 홀로 존재하고, 셋의 느슨한 이어짐은 어딘가 작은 세계의 꼭지점처럼도 보인다. 네모도, 동그라미도 아닌 세모의 세상. 이야기의 얼개를 풀어가는 건 서점 직원이 이야기하 '성실하고', 고리타분하고 그렇게 짜여진 익숙함이 아니, 언젠가 끝나버릴 여름 날의 예고된 이별, 그런 아찔함, 시(詩)와 같은 불안감이 술에 취해 느슨하게 흘러간다. '나'와 섹스를 한 그 아침, 사치코는 "질척한 건 싫어(面倒っ臭い)'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미 지금의 마지막을 알고있다. 한 번의 여름 밤이 끝나가던 무렵, 우리는 청춘을 잃는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라는 조금은 어색한 문장, 비틀즈의 노래를 그대로 옮겨온 'and your bird can sing'은 1966년의 곡이고, 원작이 된 사토 야스시의 소설은 1981년 작품, 미야케 쇼 감독과 주인공 에모토 타스쿠는 2년 터울의 80년대생에, 소메타니 쇼타와 더불어 셋은 실제 함께 '술 마시고 놀고', 굳이 이야기하면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라고 한다. 별 것도 아닌 그와 그들의 사소한 사정을 굳이 이갸기하는 건, 이 영화엔 느슨하게 이어지는 친밀함, 그곳에만 보이는 남다른 시선이 세밀하다. 줄거리보다는 시퀀스, 스토리보다는 무드, 대사와 함께 사운드, 음악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알 수 없는 내밀함이 특유의 정서를 만든다. 얼마 보지도 않았는데, '나'가 직장에 적응하지 못(안)한다는 건 한 눈에 알 수 있고, 점장과 사치코와 성의 없는 인사를 하는 장면에 조심스레 흐르던 전자 사운드는, 사치코가 '나'에게 작은 제스춰를 취한 순간 돌연 자리를 떠버린다. 그런 수상한 공백. 2층 침대에서 위아래로 자는 '나'와 시즈오는 그렇게 완성되는 침대의 한 쌍이고, 배를 바닥에 납작 붙이고 바라보는 작은 방 구석구석의 풍경은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하고 지나갈 그림인지 모른다. 서점의 이혼남 점장과 불륜 관계를 갖고있는 사치코, 돈을 빌릴 때가 아니면 연락이 없는 엄마와 이름만 몇 번 지나갈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형, '나'는 도통 알 수 없는 인물에 매일같이 지각, 결근을 하지만, 영화엔 그런 부대낌의 현실이 없다. 사적(私的)이고 시적(詩的)이게 영화는 그저 그 여름의 밤만을 걸어간다. "젊음은 없어져버리는 걸까." 사치코의 이 물음 아닌 물음처럼, 무력하고 애매하고 아리송하고, 이 영화는 그렇게 사랑스럽다. 밤 거리를 서성이는 시간, 그곳엔 도무지 정처가 없다.

https://youtu.be/3V2JldaSICM

영화는 하코타데 항구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아는 도심의 밤이 생각났다. 사실 이 영화를 가장 가깝게 설명하는 건, 밤을 지새고 걷던 새벽녘의 거리인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돌연 떠나버리는 것처럼, "술 마시고, 노는 게 뭐가 나쁘냐"고 소리치며 지샜던 밤들도 어느새 아침 중천이다. 영화는 둥탁하고 무거운 전자 사운드와 금새 부서질 것 같은 음악, 에이프론에 긴 바지를 입고 책을 정리하던 인공 빛 아래 서점과 어둠이 어둠을 더하던 네온 사인의 클럽, 비 내리던 밤과 새 소리가 들려오던 새벽같은, 그 도시의 작은 파편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던, 9월, 10월, 다른 계절은 오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은 오늘도 소멸하고 있다. 실제로 친구 사이라고도 하는 랩퍼 OMSB와 그의 음악과 '나'와 같은 계절을 사는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끝나가는 어느 새벽과, 그 만으로 완전할 것 같은 밤은 술에 취해 놀다 나선 텅빈 거리, 갑작스레 불을 밝힌 거리에서 더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성실(誠実)하기 위해 귀찮음(面倒っ臭い)을 감수해하야 하는 시절의 문턱. 그렇게 청춘은 떠나가고, '나'는 더이상 120까지 세고있을 여유가 없고, 애매하고, 알 수 없던 일상 곳곳의 물음은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한다. 청춘이란 계절을 가장 그 시절의 언어로 채워낸 축축하고 몽연한, 어느새 잊어버린 감정들을 어느 새벽 무렵에 빗대어 그려내는 우울하게 빛나는 작은 수작. 트라이앵글의 세상에서 바라보는 오늘은 어딘가 어제를 잊지 못하고, 사과 한 봉지를 받고 돌아가는 시즈오 엄마의 뒷모습, 술에 취해 서로의 어깨를 빌려 새벽 길을 걷는 서점 점장과 모리구치의 묘하게 편안한 비틀거림에서, 결코 성실하지 않지만 진실했던 그 시절의 흔적을 기억한다. 그렇게 너의 작은 새는, 밤이 걷힌 새벽 노래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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