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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05. 2020

나의 사랑은, 너의 성장이었다 '마티아스와 막심'

길을 잃을 자유, 너에게 향하는 입구

'마티아스와 막심'



세상에 어떤 시절은, 나와 내가 아닌 너 만으로 채워진다. 학창 시절에 어울리던 친구도, 집에서 마주치는 엄마와 아빠와 다른 가족들도, 결코 타인이지 못한 채 나의 일부가 되는 시절이 있다. 그건 이곳에 태어나 세상에 눈을 뜨던 때이기도 하고, 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학창 시절, 혹은 친구란 상대를 처음으로 알고 내가 아닌 '너'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아직 '나'를 만나지 못한 시간이 내가 아닌 너로 인해 하나의 세상이 되어버린다. 작지만 완전하고, 불안하지만 자유롭고, 흔들리지만 위태롭지 않은...그 무렵 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자비에 돌란의 새 영화 '마티아스와 막심'을 보며, 내가 아는 그 세계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마티아스와 맥과 리베트와 프랑크와 샤리프와..그렇게 모든 것인 세상. 물침대와 단어 맞추기와 거울과 하이웨이의 자유와 같은, 이제는 꽤나 유치해져버린 세상 모든 은유와 함께 그 무렵의 너를 생각했다. 미약하고 짧은, 하지만 찬란했던 계절이 나에게도 아마 흘렀다.



연기를 하며 나눴던 키스가 현실에 스며들 정도로 영화는 혼란 속에 있다. 예고편에서 일찍이 암시했던 것처럼 '마티아스와 막심'은  익숙히 알고있는 돌란의 영화적 아이덴티티에서 비롯된다. 남자의 몸을 하고 있지만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과제용 영화를 찍는 친구 여동생의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두 남자의 키스 장면은, 늘 경계의 비탈에서, 모호한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돌란의 영화를 그대로 은유한다. 그의 영화는 간혹 섹슈얼리티적 혼돈에 멈춰 논해지기도 하지만, 보다 (여동생의 표현을 빌리면) '인상주의'적 감각에 의존하고, 보다 '표현주의'적 현실에 다가선다. 영화는 현실 속 성인이 되어가는 시간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청춘이란 젊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길목의 풍경이다.  나란히 서서 러닝 머신을 달리는 마티아스와 막심 사이엔 그곳에만 자리하는 둘만의 감정이 있다. 친구의 별장으로 떠나는 끝도 없을 듯한 하이웨이에선 우회전 표짓판이 무심히 스쳐간다. 다섯에서 둘이 된다는 것, 그건 세상이 알을 까고 다시태어나는 시간의 문장이기도 하다. 마티아스와 막심, 그런 이름의 계절이 시작하려 한다.



프랑스 영화가 대부분 그런 것처럼, 돌란의 영화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마티아스와 막심'엔 말이 넘쳐난다. 친구들은 모여서 이기라 지라 쉴세없이 말들을 쏟아내고, 사이가 결코 좋지 않은 막심과 그의 엄마 사이엔 말이라기 보다 서로에 대한 미움이 기세 좋게 달려든다. 역시나 다툼이 많았던 '마미'에서의 엄마와, '단지 세상의 끝'의 가족들과의 대화 장면에서, '말'들은 여지없이 아프고, 자리를 뜨게하고,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 휘발되고 만다. 어쩌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원소. 그렇게 '말'을 정의할 수 있다면, 돌란의 영화에서 말들은 정답을 맴맴 도는 '단어 맞추기'에 가까운 인상이다. 무언가를 규정하는 언어로서의 말이 아닌, 어떤 것을 드러내는 촉매와 같은 유기체로서의 말. 영화 속에서의 짧은 키스가 현실에 남긴 자국같은, 조금은 미스테리어스한 현실을 은유하는 그런 말. '마티아스와 막심'엔 그렇게 쌓여진 엄마와 나 사이 '말'들의 벽이 있고, 수 년간 함께하며 생겨버린 친구들간의 자유롭지만 위태로운 찰나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 말들을 벗어나려 애를쓴다. 물속에 뛰어들면서, 물침대에서의 말랑한 하룻밤과 같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꿈틀댄다. 그렇게 유치하고 뭉클하다.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돌란 영화에 따라붙는 섹슈얼리티 문제는, 이번 영화에서도 유효하다. 돌란은 한 인터뷰에서 그런 리뷰들에 대해 '사실이지만 개인에 대한 심리적 분석은 싫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말을 따라해보면 그가 게이인 건 맞지만 그의 영화가 섹슈얼리티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그에게 성정체성은 오히려 늘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시작이었다. 친구 여동생의 치기어린 말 그대로, 무엇도 규정되지 않은, 바다의 파도도 일지 않는 고요한 강물의 한복판에서 돌란의 영화는 움직인다. 세상에 눈을 뜨는 언어로서, 나와 너를 알아보는 '말'로서 돌란의 섹슈얼리티는 작용한다. 그리고 그건 때로 절대적이다. 그의 영화에 유독 도드라지는 엄마와의 불화(라고만 말할 수 없는) 또는 애증의 리얼리티, 그건 최초의 아이덴티티 인정 투쟁이다.  '마미'에서,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서 돌란은 가장 처음 마주한 엄마라는 세계와 분투한다. 나의 모든 것이지만 결코 나는 아니고, 좋아하지만 많이 밉기도 한 엄마란 사람에 대해, 그런 우주에 반응하고 도발한다. 나를 바라보기 위해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 '아이 킬드 마더'라는 파격적 제목은 그렇게 가능하다. 섹슈얼리티 이전의 아이덴티티. 각본, 연출, 주연 거의 모든 걸 도맡아 하는 돌란의 영화엔 늘 작은 우주를 지켜가려는 다소 무모한 애틋함이 서려있다. 그런 철부지 세계가 다시 한 번 이곳에 찾아왔다.



'마티아스와 막심'은 성장 영화다. 로맨스 영화고, 청춘 영화고 퀴어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랑하고 표류하는 혼돈의 영화다. 막심은 엄마를 떠나 호주로 향할 예정이고, 출발일은 점점 다가오고, 그 날은 왜인지 조금씩 미뤄지기까지 한다. 막심과 친구들은 즐겁게 밤을 지새곤 하지만 ,언젠가 끝나버릴 계절문턱다. 우정과 사랑을 의심하는 작은 에피소드로 시작해 영화는 줄곧 그런 혼돈 속에 있다. 고등하교 시절의 키스를 막심은 기억하지만 마티아스는 기억하지 못하고, 아빠에게 받아놓은 막심의 추천장은 보내지도 못(않)한 채 3주가 지나버렸다. 우정이냐 사랑이냐 그 아리송한 물음에 관해서도, 막심은 이미 엄마 일 만으로도  파도가 거세고, 마티아스는 길을 잃을까 물침대에도 가슴이 철렁한다. 이런 미숙함들. 이런 치열함. 그리고 너와 나 사이의 지연(遲延)들. 돌란은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메타포로 둘의 한 시절을 채색하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 젊음과 혼란을 이야기하기에 이는 그 어떤 말보다 유효하다. 숱하게 많은 외면과 부딪힘, 끊임없는 나에서의 탈주와 너를 향한 갈망. 너와 나는 아름답게 길을 잃는다.


돌란 영화에서 사랑은 묘한 1인칭이고, 너를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영화는 끝내 '마티아스와 막심'의 'M&M' 그 두 자 만을 남기고 지워버린다. 이토록 인상주의적이고 표현주의적 해방이라니. 그의 영화엔 세상 끝에 시작하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건, 너란 이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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