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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r 28. 2017

어쨌든 살겠지

밥을 먹겠지. 병원엘 가겠지.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겠지, 영화를 보겠지

꽤 오래 전부터 시간을 뭉텅이로 세기 시작했다. 병원에 있을 땐 끼니와 검사로, 그리고 최순실 사건의 시작과 끝으로, 일을 쉬고 놀고 있을 땐 전 직장 퇴사 시기와 그 다음 회사 입사 시기로 시간을 세면서 기다렸다. 어제 "함께 저 어디 산에 가서 살자"는 엄마의 말을 듣고 많이 생각했다. 이건 사건이다. 생각치도 못한 대안이다. 1년간 일본에 있다 돌아와 6개월만에 일을 구했다. 올해 5월 보그를 그만 두고 3개월을 쉬고 직장에 들어갔다. 내 시간 셈법이 맞다면 이르면 3개월째 늦으면 6개월째에 재취업을 해야한다. 9월에 퇴사해 6개월째 놀고있다. 퇴원을 기준으로 치면 3개월은 쉬고 3개월은 놀고있는 셈이다. 산에 가는 일은 내 시계에 없다. 세상엔 의지보다 기다림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있다. 나약한 변명이 아니다. 하고싶은 걸 다 할 수 없는 건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녕 몸의 문제가 아니고 시간의 문제다.


책을 쓴다. 병원에서의 일기를 장황하게 풀다 장르 소설 공고를 보고 소설로 바꿔봤다. 제육볶음을 밥과 함께 먹고 자전거를 타는데 내가 지금 쓰고있는 글이 어거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실히 어거지다. 어거지를 도려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끝을 보자고 마음 먹었다. 엄마는 지금의 내 생활에 불만이 없는 것 같다. 종종 엄마가 주는 돈으로, 그리고 누나들이 주는 용돈으로 가끔씩 영화를 보고 외출을 하면 사는 게 괜찮다 생각하시는 것 같다. 나도 나쁘진 않다. 솔직히 호강이다. 마음껏 운동도 할 수 있고, 책도 볼 수 있다. 회사를 다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자주 우울에 빠진다. 그리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수도없이 생각하고 고민한 것들이 백지 상태가 된다.  


아르바이트를 생각했다. 프리타로 살면서 하고 싶은 걸 하는 삶을 떠올려봤다. 이미 일본에서 한 차례 해본 거다. 스타벅스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었다. 파리바게뜨에서 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 가지 않았고 많이 후회했다. 다가온 타이밍을 흘려 보냈다. 겨울이 갔다. 겨울이 갔단다. 치즈크림과 우유를 사러 마트에 가는데 완연히 봄 날씨다.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았고 깡 마른 나무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 날씨는 겨울이다. 뭉텅이 시계가 뭔가에 걸려 움직이지 않는다. 밥을 먹겠지. 병원엘 가겠지.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겠지. 그리고 영화도 보겠지. 어쨌든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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