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슬픔, 절망과 허무 곁엔 재생과 치유, 회복과 희망이 있었다.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과 선명한 초록빛 들판. 그 안에 한 소년이 있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소음도 잡음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100% 에테르의 우주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하나의 세계를 제시하며 시작한다. 가수 릴리 슈슈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1980년 12월 8일 22시 50분. 릴리가 태어났다. 그녀는 에테르를 구현한다. 에테르는 평온함과 영원의 장소다. 영화는 릴리의 세계를 구술한다. 우리에겐 친구가 있고, 부모도 있으며, 애인도 있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걸 견디며 살아가고, 그것이 에테르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한다. 그러니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가 제시한 건 현실에서 도망친 세계다. 소년 유이치(이치하라 하야토)는 단짝 친구 호시노(오기나리 슈고)에게 이지메를 당하고, 그의 아빠는 친아빠가 아니다. 그가 혼자 좋아하는 쿠노(이토 아유미) 역시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다. 화창해야 할 젊은 날이 보기 흉하게 구겨졌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현실은 상처 가득한 지옥이다. 마음이 약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유이치는 친구들에게 떠밀려 이지메의 가해자가 되고, 같은 반 친구인 츠다(아오이 유우)는 호시노에게 약점을 잡혀 원하지도 않는 원조교제를 한다.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아 강간을 당하는 쿠노와 이를 다 주도하는 호시노까지. 세상은 잿빛이 되었다.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릴리 슈슈의 음악, 에테르의 세계다. 영화는 현실과 채팅 화면 상의 대화를 자주 오가며 현실 이면의 현실을 보여준다. 노래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고 마음으로 답할 수 있는 세계. 현실이 버거워, 현실에서 버틸 수 없는 이들은 릴리와 에테르의 세계에서 호흡한다. 현실에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어 에테르에 매달린다. "우리에겐 낙원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연 속 생물들에겐 지옥일지도 몰라." 오키나와 여행에서 만나는 남자 타카오(오오사와 타카오)의 대사다. 이아이 슌지 영화는 예쁘다. 녹색 빛 전원은 허망할 정도로 눈부시고, 츠다의 장례 행렬은 슬프게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픔과 고통이 있다. 치유하지 못하는 현실의 상처가 있다. 릴리의 노래가, 에테르의 세계가 필요한 이유다.
영화는 종반에 이르러 두 번의 죽음을 던진다. 하나는 출구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츠다의 자살이고, 또 다른 하나는 꾹꾹 참고 있던 감정을 터뜨려 저지른 유이치의 살인이다. 현실은 이들의 죽음을 방조했고, 릴리의 노래는, 에테르의 세계는 이들의 죽음을 구하지 못했다. 합창 대회에 참가해 불렀던 아이들의 노래가 떠오른다. "새와 같은 하얀 날개를 달아주세요. 파란 하늘에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고 싶어요. 슬픔이 없는 자유로운 하늘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고 싶어요." 이들은 날지 못했다. 에테르에만 의존해 사는 삶은 너무나도 연약했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무참히 부서졌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가 건네는 엔딩은 참혹한 그림이 아니다. 성폭행 당한 후 머리를 빡빡 깎았던 쿠노는 학교에 돌아와 다시 피아노를 치며, 호시노를 칼로 찔렀던 유이치는 미용실 파마 기계에 머리를 넣고 자기만의 우주를 본다. 세상은 에테르로 가득차고 파란 하늘엔 흰 글라이더가 떠다닌다. 릴리의 세계가 현실을 대신할 순 없지만 호흡과 호흡이 공명하는 순간을 선사해 줄 순 있다. 고통과 슬픔, 절망과 허무 곁엔 재생과 치유, 회복과 희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