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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Dec 26. 2021

우린 완벽하게 이별할 수 있을까

너와 나의 계절 감각,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다 하지 못한 말'




침묵을 깨고 그가 말했다. ‘OO, 생일 축하해. 기프티콘 3만원 내에서 갖고싶은 거 말해줘.’’ 아마도 매우 오랜만의 연락이었고, 화면을 내려보니 마지막 메시지가 오고간 건 2020년 12월 21일 늦은 저녁이었다. 꼬박 1년이란 시간, 채워지지 않은 빈 칸에 난 새삼 그와의 시간을 생각했을까. 아니, 어쩌면 매해의 마지막이란, 다시금 그와 그들에게 연락을 하게되는 시기일까. 아무튼, 난 대충 두 가지 이유에서 당황을 하고 말았는데, 먼저 ‘나의 생일은 이미 한 달 이상 지났다는 것. 그리고 ‘갖고싶은 거 말해줘’와 같은 말에 난 가장 서툰 유형의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분히 A 형 성격같은, 전형적 소심함과 주위를 살피다 결국은 도를 넘어 포기하고 마는 극도의 ‘안전 제일’형 인간 관계가 만들어낸 너와 나 사이의 살얼음판. 애초 그가 왜 나의 생일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는 카톡 만이 알고있겠지만, 아마 난 태어날 때부터 이런 대화가 가장 어려웠다. 고마움에 대한 답례, 칭찬에 대한 리액션. 하물며 어린 시절 좋아하는 장난감 하나 조차 맘대로 사달라 떼쓰지 않았으니.



안그래도 손에 땀이 많은 체질에 핸드폰은 땀으로 젖어가고, 번지수도 찾지 못하는 고민은 자판 어디도 누르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었다. 축하를 받은 고마움과, 하지만 잘못 찾아온 축하라는 사실과,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나의 사이, 관계, 친밀도가 과연 ‘갖고싶은 거 말해줘'란 말에 바로 답을 할 수 있는, 해도 되는 정도의 ‘사이'인지에 대한, 자문자답. 애당초, 카톡 메시지의 대답 유효기간은 얼마까지인지. 그저 내가 알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에, 이런 고민에, 결국 어떤 대답도 결코 정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 그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멈출 재주가 내겐 없고, ‘마음만 받을게요.' 한참이 지나 난 작은 이모티콘을 붙여 겨우 송신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30분이 훌쩍 지나 보내진 외마디 문장의 대답. 그 ‘한참'은 그에게 얼마 만큼의 침묵이었을까. 땀에 젖은 핸드폰을 닦아내고, 답이 오지 않았다.



댓글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 SNS에 무언갈 긁적이면 종종 댓글이란 게 달린다. 난 이게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인데, 대화로 따지면 뭐라도 답을 하거나 웃어 넘기거나 정 아니면 화제를 돌리면 될 일이지만, SNS라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속의 그와 그들에게 난 무어라 답을 해야할지…대다수 망설이고 만다. 물론 이모티콘이란 게 발명되어 적재적소, 유효하게 활용하면 될 일이지만, 웃는 얼굴에 땀방울 하나 없으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게 나란 인간이다. 오해를 남긴 건 아닌지, 핸드폰 기종 차이로 웃음의 의도가 왜곡된 건 아닌지. 그러니까 나의 웃는 얼굴이 그에겐 혹여나 비웃는 얼굴로 전해진 건 아닌지. 답을 해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오히려 그보다 더한 상황을 초래해버린 것만 같은.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라면 헤어짐 후에야 밀려오는 고민이 SNS 창 구석 곳곳 얼룩처럼 비지땀을 흘린다. 5G로 와이파이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엄연히 다른 곳, 다른 시간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는 각자의 말줄임표. 이런 걸 어쩌면 ‘디지털 시차’라 말할 수 있을까. 난 종종 채팅창 너머 너의 표정이 진지하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처음으로 '줌' 취재 대상이었던 D&department 나가오카 켄메이 씨.


코로나가 시작되고, 아니 그보다 전 프리랜서가 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일은 ‘만남'을 경유하지 않고 이뤄졌다. 메일을 주고받으며 기획을 정하고, 문자 메시지나 전화 통화로 일정을 조율, 업종 특성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단 한 번의 얼굴 마주침도 없이 대략 대여섯 직종의 협업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함께 진행됐다. 서울과 인천과 마포와 때때로 도쿄와. 코로나 이후 이런 ‘원거리 근무'는 보다 일상이 되었는데, 처음도 아니면서 난 새삼 고작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과의 협업이 과연 ‘나의 일'이라 말할 수 있을지,  아리송한 순간에 봉착하곤 했다. 완전하지 않은 대화, 오해를 경유한 이해, 어쩌면 보이지 않는 시차이거나 나와 그 사이의 이런저런 차이들이 불러온 예정되지 않은 결말들. 대부분 일은 일로서 끝이나고 말지만, 지난 여름 ‘줌'으로 인터뷰를 하기 시작하면서 난 너와 나 사이의 거리, 상대가 떠난 빈 자리에 남은(비친) 나를 마주하곤 했다. 그러니까 너의 곁에서 '나란 고독.'

너의 화면이 꺼지고 암전된 스크린이 디폴트 배경 파랑으로 물들기 까지의 짦은 시간 속 ‘나라는 혼자’가 그곳에 나타났다. 너가 있었던 자리에 나의 '오늘'이 덜커니 남았다. 재택 근무를 이야기하는 시절, 그저 배부른 소리, ‘럭키한 사건’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난 사실 별로 배가 부르지 않고, 그다지 럭키한 기분도 아니다. 우린 어쩌면 서로의 진심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침묵이 남아있다. 보지 않은 세월이 한참이라 이제는 ‘플사’ 만으로 누구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그와 마지막 나눈 대화는 어느덧 5년도 더 지난 여름이었다. 핸드폰을 바꾸어도, 번호가 바껴도 개인 매신저 어플엔 내가 아닌 그들과의 기록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너가 아이폰 13으로 갈아타고 내가 벼르고 벼르다 아이폰을 버리고 블랙베리를 장만해도, 그 모든 시절을 거슬러 그곳에 남아있는 너와 나의 기록. 전형적 문과 인간인 내가 이 원리를 알 리는 만무하지만, 난 때때로 이 지나간 흔적들을 ‘관계의 유산’이라 말해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한 때 인연, 어쩌면 그도 아닐, 혹은 오해거나 지워지지 않은 갈등으로 멀어진, 그리고 어쩌면 네게서 삭제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관계의 흔적은 지금 이곳에도 그리고 그곳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지금도 또 하나의 메시지는 숫자 1을 지우지 못한 채 네 곁에서 ‘오늘'을 기다린다. 

어쩌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란, 우리가 몰랐던, 잊고 지나갔던 너와 나 사이의 '거리', 오해와 아쉬움의 날들을 일일히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 모든 만남은 미완의 대화로 이어지고, 우리에겐 다시 시작하기 위한 ‘미완성의 대화'가 필요하다. 침묵을 남긴 대화창에, 엔딩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https://youtu.be/6W6HhdqA95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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