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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20. 2022

도쿄가 A.D 코로나를 사는 법

팬데믹 한복판에 다시, '시계'를 그리다




BC 팬데믹, 2020년 이른 겨울 도쿄에서 면접을 보고 돌아오자 코로나 상황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확진자가 발생, 늘어나고 국내에서도 1호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만 듣고 출발했던 도쿄행인데, 고작 3일이 흘러 TV에선 사뭇 차가워진 톤의 코로나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확진자의 동선, 밀접 접촉자의 추적이 매일같이 전해지며 생활 동선이 돌연 ‘위험 반경’으로 돌변하던 무렵이었던가. 일단은 대대적 감염병이 확산될지 모른다는 공포, 바이러스가 근접해오고 있다는 불안, 즉 팬데믹의 위기감이 덜컥 느껴졌지만, 사실 그와 별개로 난, 아니 그보다 더 도쿄에 두고 온 면접 결과가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잘했다고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못해서 불안했지만, 어쩌면 그와 상관없이 결과가 좌우되는 일이, 그러니까 잘했든 못했던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초조해졌다면 부끄럽지만 좀 사실이다. 

게다가 내가 지원했던 건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 리뉴얼을 준비하던 ‘츠타야 시부야’의 기획직. 그야말로 설마가 현실이 되는 건 아닐까 난 끝내 두려워지고 말았는데, 그 즈음 TV에선 방역을 위해 각국이 입국문을 걸어닫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코로나와 도쿄와 올림픽과 '나.' 우린 왜 하필 이 시기에 만나버렸을까. 시작을 바랬지만 어쩌면 엔딩. 세상은 새삼, 타이밍이란 걸 난 처절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시간을 말하다, 

90년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하고 요일 감각을 잃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뒤 계절에 이변이 생겼고 덩달아 계절을 감각하는 생활의 루틴도 희미해진다. 코로나가 뒤바꿔놓은, 혹은 의문을 제기한 일상이란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매일같이 확진자 수의 동태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하루란, 돌연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시간’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오지 않는 면접 결과를 기다리는 오늘이 오늘같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포기되는 내일이 이미 어제가 되어있는 것처럼, 시간은 갑작스레 나타나 '오늘이 언제이고 내일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의 바다’ 속에 우리 일상을 빠뜨려버린 것만 같았다. 아마도 코로나가 종식되는 그 날을, 내일로 기다렸을까. 시간을 의식하는 순간 사람은 공포를 느낀다고,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추 펠릭은 자신의 책 '공간의 종류들'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일본엔 ‘시간의 날( 時の記念日)’이란 게 있다. 다이쇼(大正) 시대 당시 ‘문부성(文部省)’이 시간에 대한 전시를 연례 행사로 개최하며 제안된 기념일이고, 일본의 대표적 시계 브랜드 ‘세이코(セイコー)’가 그 날, 바로 6월 10일을 창립일로 한다. 1932년 6월 1일, 긴자 중심가 4쵸메 로터리에 본사 건물을 세워 올해로 90주년을 맞았다. 이후 이 건물은 자사 백화점 ‘와코(和光)’의 본관이 된다. 그리고 그 건물 꼭대기 옥상에 시계 브랜드 답게 고층 시계탑이 있는데, 한 세기가 흐르는 가운데 아무런 변화도 없다. 90년 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 앞뒤 양옆 모두 네 개 면엔 네 개의 시계가 설치되어 있고, 매 시간 정각이 되면 어김없이 차임벨을 울린다.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그 시간이 지금 여기 있다고, 지금은 어김없이 OO시 정각이라고, 시간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러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요즘은 손목 시계도 아닌 스마트폰이면 충분한 시대인데, 새삼 시계탑의 의미, 역할이란 남아있을까. 



수 천 번의 차임벨이 흐르고 또 한 번의 6월 10일을 맞은 지난 2022년의 ‘시간의 날’, 그러니까 '세이코'의 90주년. '세이코'는 건물의 이름을 '와코'에서 ‘세이코 하우스 긴자(セイコーハウス銀座)’로 바꾸었다. 하루도 틀림없이 시간을 알려오던 시계탑의 건물인데, 무려 90년만에 이름을 고쳐 지은 것이다. 매일이 같고 또 다른 하루, 난 그야말로 새삼 시간이란 무엇일까 싶은 기분이 들었는데, ‘세이코’에서 무려 30년을 근무한 사나다 노부코 씨는 좀 생소한, 그래서 다분히 일본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시대가 변화한 지금도 계속해 시계탑과 함께 손님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합니다. 이 시계탑을 긴자란 마을이 지켜준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요.” 바꿔 말해보면, 그 즈음을 지나던 우리의 90년이 그곳에 기억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일까. 또는, 시계 혹은 시간이란 오직 기억을 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그래서 잊고 살아가는 오랜 사실을 가리키는 걸까. 코로나가 1차 피크를 지나 숨고르기에 들어간 시점, 한국에선 이른 여름에 거리에 반팔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도쿄에 두고온 나의 면접엔 약간의 체념이 담긴 마침표가 찍혀있었다. 

코로나가 지워버린 6월의 어느 날, 난 왜인지 그 날을 새삼 기억하고 싶었다.


하얀 셔츠의 시간

일상을 다림질에 비유해보다



아주 오래 전, 이제와 찾아보니 2016년 9월 일본에선 ‘하얀 셔츠를 돌아다니는 여행(白いシャッツをめぐる旅)’이란 이름의 캠페인이 진행된 적이 있다. 작가이자 수첩을 만드는 회사 ‘호보니치(ほぼ日)’의 창립자 이토이 시게사토 씨의 기획이고, 웹진에서의 연재를 마친 뒤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에선 하얀 셔츠만 모아 판매를 하는 이벤트도 열었다. 하얀 셔츠란 가장 기본, 너무나 심플해 쉽게 간과되기 쉬운 아이템이지만, 캠페인은 그래서, 평범한 나머지 잊혀지고 마는 일상스러움, 그 미덕을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당시의 난, 서른 넷. 직업상 셔츠 입을 일도 없으면서 꽤 공감을 하고 말았는데, 흰 셔츠란 어쩌면 시간같다고 생각했다. 기획을 함께 한 쿠마모토에서 셔츠를 생산하는 HITOYOSHI의 타케나가 카즈유키 씨가 셔츠를 다리는, 다림질을 하는 일과가 정확하게 시계 바늘처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일요일 저녁 타케나가 씨는 일주일치 입을 옷들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다림질을 한다. TV를 보며 매일의 일정을 떠올리며 정해진 순서대로 다리미를 움직인다. 똑같이 보이는 하얀 셔츠이지만, 한 벌 한 벌 서로 다른 날들이 다림질 순으로 기록된다. 나아가 그 과정 또한 철저한 계산과 시간에 의한 순서로 움직이는데, 예를 들면 모든 다림질은 ‘기껏 말려놓은 옷을 다시 적셔?’라 할 정도로 분무기로 물을 듬뿍 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옷깃의 바깥 쪽(옷깃의 안감)을 다릴 때에는 네임택이 천장을 보게 놓고 바깥 쪽부터 잡아당기는 감각으로, 앞에서 ⅓ 지점까지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이 때 타케나가 씨는 힘을 주지 말것을 주의한다. 그 때야 말로 기껏 다려놓은 옷에 주름을 만드는 일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간만에 일찍 일어났다 다시 눕는 바람에 결국 또 늦잠을 자버리게 되는 경우와, 대충 비슷하다. 



타케나가 씨의 다림질은 고작 옷깃을 다리는데 네다섯 가지의 공정을 필요로 한다. 그게 끝이 아니라 이후 팔, 그리고 몸통까지 비슷한 과정을 반복한다. 그 지난한 시간이 내겐 그저 아득해 엄마에게 부탁하는 게 훨 낫겠다 생각했는데, 아마도 그렇게 (셔츠와의) 일상의 실패가 시작된다. 티셔츠나 청바지를 포함, 웬만한 옷들은 빨래 후 팍팍 털어두면 주름이 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얀 셔츠란 어김없이 하루를 입고 시작하기 위해 ‘다림질의 시간’을 거친다. 다소 번거롭고 귀찮지만, 그렇게 우리 일상, 시간과 좀 닮아있다. 타케나카 씨는 엄마에게 의존하는 날 채칙이라도 하는 듯, 다림질을 스스로 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했는데, 그의 또 하나의 명언을 소개하면, ‘옷을 다리는 건, 곧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다시 닫는 것과 똑같다.’ 

하얀 셔츠는 똑같아 보여도 입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을 내다.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린 서로 다른 하루를 산다. 매일이 같은 하루도 실은 매일매일 다른 하루가 되어있다. 그게 아무리 코로나 한복판에의 일이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하얀 셔츠를 입는다는 건, 그만큼의 시간을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 세상엔 어쩌면 하얀 셔츠로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 


부러 시간을 멈추는 시계

'시간의 자유'를 연주하다



창립 90주년을 맞은 지난 6월 13일,‘세이코’는 12달에서 연유했을 열 두 개의 소리를 채집 'Seiko Harmony'란 걸 제작했다. 시계를 완성하는 기술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뮤지션  Wonk의 에자키 아야타케가 작곡한 멜로디를 기존의 ‘웨스트민스터 차임’ 벨을 대신해 틀었다. 모두가 잠에 든 24시 이후 08시 이전을 제외한 매시 정각, 전과 달리 서로 다른 종소리가 긴자 거리를 물들인 것이다. 물론 시계 종소리 하나에 12개의 멜로디가 필요할까 싶기도 한데, 그렇게 오후 3시는 저녁 5시와도, 아침 9시와도, 바로 한 시간 뒤 16시와도 다른 음색의  시간을 갖는다. 똑같이 시침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서로 다른 다른 일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은유한다. 즉,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아마도 ‘세이코’는 코로나 이후 무뎌진 우리의 시간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서로 다른 12개의 소리를 준비했던 게 아닐까. 익숙해진 종소리가 아닌, 서로 다른 멜로디의 아침 9시와 오후 2시로. 달리 말해 코로나 혼돈기에 생생한 '리얼 타임'의 멜로디로 부러 오늘을 이야기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시간을 다시 시간으로 데려오려는 시도를 했던 게 아닐까. 코로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그런 비극에서 알아차리는 지금이란 시간처럼, 그 무렵 너와 나는 '다시 시작하는 하루'를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돌연 멈춰버린 시간의 묘한 정적과 낯선 여유로움의 어떤 환기와 같이. 90주년을 기념하던 그 12개의 시계 소리는 어딘가 희미해진 일상, 그 시간의 소리를 찾아가는 멜로디처럼도 들려왔다.



그리고 벌써 4년 전, 연호가 헤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넘어갈 무렵, ‘세이코’는 시계탑의 시계를 가려버린 적이 있다. 무려 90년 가까이 시간을 알려오던 그 시계탑의 얼굴을 가리고 하나의 문장을 적었는데, 그게 바로 ‘시간을 쉬게하자(時を、休もう)’이다. 말하자면 시계가 잠시, 시계임을 포기했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을 멈춘다는 것. 시침을 멈춘 시계가 이야기하는 것. 세상엔 그렇게 드러나는 시간이 있다. 하루가 바쁘게 살아가는, 시계 볼 여유도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잠시 멈춤을 택한 시간은 그렇게 시간을 이야기한다. 잠깐의 멈춤으로서 흘러 지나가던, 벌써 도망가버리는 시간을 감각한다. 메시지의 취지는 스피드에 쫓기는 도시 생활에 자유, 여유를 갖게하자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그곳에 시간이 흐른다. 어쩌면 그런 도쿄의 시간 감각.

코로나는 돌연 일상을 앗아갔다고 하지만, 우린 누리고 있던 일상을 알아차린다. 휴업을 선언한 시계는 갑작스럽지만, 그제야 여유로운 시간을 느낀다. 나의 시작과 함께 끝나버린 츠타야 면접기도, 코로나에 묻혀 '미운 오리'가 되어버린 도쿄의 올림픽도, 코로나와 싸우던 우리의 지난 3년도 모두 흘러간 어제가 되었지만, 언젠가 ‘오늘’이었던 그 시간을 '일상의 시계'는 기억한다. 그렇게 오늘을 확신한다. 변화가 무성한 요즘 도쿄에선 100년 노포들의 마지막 인사가 줄을 잇는데, 그런 눈물이 이야기하는 건 분명 다시 시작하는 하루이다. 비로소 내일을 다짐한다. 다시 한 번 펠릭의 책을 빌려오면 '공간이 채움으로서 드러난다면, 시간이란 비움으로서 느껴지는' 성질의 일상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흘러간다. 실패한 하루를 추스리며, 8번째 차임벨이 울리는 오후 4시에, 그리고 하얀 셔츠를 다리는 스팀 속에, 또 하루가 저문다. 비록 그것이 코로나로 짓밟힌, 상처나고 주름진 시간이라 할지라도, 시간은 애초 흘러가는, 잊혀지는 것. 멈춘 시간에서, 짓밟힌 일상에서야 보이는,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의일상)이 있다. 비온 뒤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불빛을 찾는 것처럼, BC 코로나를 지나 A.D 코로나를 향해, 서툰 솜씨의 다리미가 실패를 극복하려 다시 한 번 셔츠를 다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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