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Jun 12. 2017

찌질함의 쓸모

무수히 많은 작고 작은 소중함, 작지만 소중하게 살면 될 것 같다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신 날이다. 어제부터 누나들은 분주했다. 큰 누나는 고기를 재우고 있었고, 막내 누나는 전복을 칫솔로 빡빡 문지르고 있었으며, 둘째 누나는 사가지고 온 각종 나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나는...파티를 하던 날에도 나는 편지 한 통을 썼을 뿐 그냥 먹기만 했었다. 해드릴 수 있는 게 너무 없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식탁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보기가 좋아 사진도 한장 찍었는데 나는 시무룩했다. 그리고 나는...나는...또 먹었다. 먹기만 했다. 운동을 하는 날임에도 의욕이 나지 않았고 심지어 눈물까지 났다. 가고자 했던 전시도 볼 기분이 아니었다. 밖에 나와 아저씨 두 분, 군인 두 명, 그리고 수녀님 두 분을 만나기 전까지 내 기분은 흐림이었다.


채소 과일 가게 아저씨가 한 할아버지가 매고계신 배낭의 지퍼를 잠가 주고 계셨다. 군인 두 명이 핸드폰을 찾아준 아저씨에게 구십 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네번이나. 마지막에 한 군인은 경례도 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혼자 흐뭇해했다. 신촌에 도착해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맞은편에서 건너오시는 수녀님 옷에 세월호 노란색 리본이 보였다. 정답게 대화를 하고 계셨다. 기분이 조금씩 개기 시작했다. 별 거 아닌 광경이 별 거처럼 느껴졌다. 아픔과 흐림은 그대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카드가 대지 않아 버스비를 내지 못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않으셨다. 핸드폰을 열었다. 창간 19주년을 맞은 이토이일간신문의 이토이 시게사토 편집장이 글을 올린 게 보였다. 헤매고, 외롭고, 좌절하고, 지지부진해도 괜찮다고, 그건 대단한 헤맴이고, 대단한 외로움이며, 대단한 좌절이고, 대단한 지지부진이라고, 그런 열 아홉이어도 괜찮다는 문장에서 멈쳤다. 아픔은, 외로움은, 지지부진함은 밀어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토이 씨의 글을 읽으니 그건 그것대로 멋진 게 아닐까 싶었다. 대단하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 마을 버스를 탔다. 카드는 정상이었다. 검정치마의 새 노래를 들으며 비하인드에 왔는데 검정치마의 오래 전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파가 빈 자리였다. 사장님 아저씨는 새우 아스파라거스 샐러드의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하셨고, 나는 무슈 샌드위치를 시켰다. 아저씨는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셨다.  


아픔도, 찌질함도, 나약함도, 헤맴도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새삼 느꼈다. 최선은 밀어내고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도 최선을 다해 품고 보듬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시에는 가지 않았다. 조금 더 편하고 아늑한 곳에 가야할 것 같았다. 엄마는 저녁을 먹고 오라며 백화점 상품권을 주셨다. 큰 누나는 용돈을 주고 갔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해드릴 수 있는 게 너무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슬퍼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조금 더 즐겁게 아침을 먹지 않은 걸 후회했고, 눈물을 참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런데 나는...나는...그런 게 나인 것 같다. 아파하고,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그런 나. 이토이 씨는 이토이일간신문을 50을 앞두고 했다고 한다. 그분의 글에는 무수히 많은 작고 작은 소중함이 담겨있다. 작지만 소중하게 살면 될 것 같다. 아파도 소중하게, 상처도 대단하게. 내가 나를 아끼지 않으면 살기는 힘들다.

매거진의 이전글 심호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