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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형 May 17. 2020

나의 창업이 에고였음을 알아차렸을 때

에크하르트 톨레의 통찰로부터


폐업을 하고 3개월이 지났다. 회사와 함께 사라질 것 같았던 나의 삶은 온전히 흐르고 있다. 실패한 청년으로 기억될 것 같았던 두려움. 사람들이 떠날 것 같던 초조함.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뒤로하고, 나는 여전히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떠나지 않았으며, 나와 나의 주변은 사실 크게 변하지 않았다.


ego(에고). 영어사전을 펼쳐보자면 에고는 1. 자부심; 자존심 2. 자아라는 뜻이라 한다. 사전에서 찾은 에고는 이토록 단순했는데, 지금부터 이야기하게 될 에고의 이야기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듯하다. 내가 에고를 다시금 듣게 된 것은 가깝게 지내는 형으로부터였다. 그는 내게 종종 “너는 에고가 강해”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좋은 거예요?”라고 되물었다. 어림짐작 그가 내게 에고가 강하다고 말한 것은 자기주장이 쎄다, 자존감이 높다, 자의식이 강하다 등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학창 시절, 나는 언제나 목표가 뚜렷한 학생이었다. 목표, 열정, 도전, 모험 같은 단어들에 가슴 뛰었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본인의 꿈과 목표를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청소년을 나쁘게 볼 어른은 없었다. 어딜 가나 어른들은 나에게 어린 친구가 참 기특하다고, 장하다고 했다. 소위 장래가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나는 젊음이란 본디 열정을 다해 뭔가를 도전하고 성취하는 뭐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는 늘 확신에 가득 찼고, 꿈을 향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나조차도 그런 나의 모습을 좋아했고, 스스로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뚜렷한 목표, 확신, 자신감은 내가 창업을 하는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와 함께 내가 폐업을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아픔들에도 크게 기여한다.


당신이 심리학을 공부했다면 에고에 대해서 들어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에고는 사전적 의미의 에고도, 프로이트의 성격이론에 나오는 에고도 아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라이언 홀리데이가 [에고라는 적]에서 말한 에고의 정의를 소개하려 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에고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 거만함이 그렇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이 그렇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성마른 어린아이와 같고 어떤 것보다 자기 생각을 우선하는 특성을 가진다. 합리적 효용을 훌쩍 뛰어넘어 그 누구(무엇) 보다 더 잘해야 하고 보다 더 많아야 하고 또 보다 많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 이곳이 바로 에고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자신감이나 재능의 범주를 초월하는 우월감이나 확신이기도 하다.


당신이 에고라는 단어를 어떻게 알고 있었든, 당신은 이제 내가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에고였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단순히 우월감과 확신에 찬 거만한 이들의 믿음만은 아니다. 내가 가장 중요한 존재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과 초조함,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해나가는 것. 그것 또한 에고이더라.


사업을 시작하고, 나는 나의 이름보다 ‘도트윈 대표’라고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스물 두살인 내가 한 회사의 대표라니. 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리 불리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 같았고,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의 꿈, 디자인에 대한 나의 생각과 철학, 스타일을 담아 만든 도트윈이라는 회사에 내가 아닌 것이 없었기에 도트윈은 나의 전부이자 나 그 자체였다. 회사를 창업하며 나는 오랜 꿈을 이뤘고,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을 브랜드에서 모두 할 수 있었다. 도트윈을 통해 관심을 받았고, 인정을 받았고, 주목을 받았다. 언론에 도트윈과 함께 소개될 때면, 나는 진정 성공한 듯 뭔가를 이뤘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랬던 내가 폐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창업을 하고 2년이 지났을 때이다. 자신만만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나는 함께 창업했던 팀과 깨졌고,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창업이 맞긴 했는지 고민하게 되었고, 원했던 것은 모두 이뤘던 것 같은데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른 체, 점점 불확실해지는 목표와 꿈으로 인한 불안감과 두려움은 우울감이 되어 더 이상 견디다 못해 폐업을 결심한다. 도트윈이 곧 나였기에 도트윈을 정리한다는 것은 내 삶이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도트윈 대표로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 경험들, 기회들은 더 이상 내 곁에 없을 것이었다. 도트윈이 내가 쌓아온 전부였으니까. 그럼에도 폐업을 결심했던 것은, 진정한 나를 찾아야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도트윈 대표로만 알려진 나의 모습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도 해본 적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그 화려한 창업스토리 속에 있는 대표가 아닌 그냥 청년으로서 존재하고 싶었다. 나는 한 회사의 대표이기 이전에 디자이너이고 싶었고, 그 이전에 그저 멋모르는 20대 청년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나의 모든 것들이 나의 회사로 평가받는 듯했다. 회사의 매출, 회사가 하는 일, 회사에서 내는 업무성과 등이 사회가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나는 ‘도트윈 대표’에서 나를 잃어갔다. 더 이상 나의 회사만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았고, 도트윈이 나의 전부이기 싫었다. 나 그 자체였던 도트윈을 폐업하고 싶었던 이유가 나를 찾고 싶어서라니.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도트윈으로 존재했던 나는 누구고, 내가 찾고 싶었던 나는 누구였을까.


폐업을 고민할 때, 내가 찾은 형이 있었다. 내게 에고가 강하다고 말했던 그 형이다. 나는 그를 사회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어른스럽지 않아 보이지만,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주변의 평가가 두려워 누구에게도 고민을 꺼내지 못했을 때, 그에게 나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폐업을 하자니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들이 너무 아까운 것 같아. 그리고 도트윈을 좋아해 주고 기대해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변의 기대들을 저버리는 것 같아서 죄책감에 힘들 거 같아. 폐업을 하면 내가 이제껏 해 논건 없는 거니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까 봐 무서워.” 그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너가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너가 뭔가 많이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너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나를 위로했다. 그는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아까워하기에는 그렇게 대단한 것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는 그저 편하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


내가 그를 따라서 요가를 시작한 것은 꽤 우연한 계기였다. 늘 관심은 많았지만, 기회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요가원을 등록한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내 몸은 왜 이토록 뻣뻣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동작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사바 아사나(Shava-asana) - 송장자세. 늘 마무리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사바 아사나였다. 온몸에 흐른 땀은 요가매트를 지나 땅 속 깊은 곳까지 나를 데려갔다. 언제나 나의 머릿속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만큼이나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그곳은 불암감을 만들고, 두려움을 만들고, 끝내 우울감을 만들었다. 땅 속 깊은 곳은 조용했다. 근래에 나에게 온전히 집중했던 시간이 있었던가.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허락된 수련시간이 좋았다. 그 공간, 그 행위, 그 시간이 좋았다.


어쩌면 그곳에서 에고가 아닌 현존하는 나의 존재를 조금씩 깨우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가원을 그만둔 지 꽤 시간이 흐른 뒤, 선생님은 언젠가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다며 한 권의 책을 보내주셨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적 교사라고 알려진 에크하르트 톨레의 저서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A New Earth]였다. 수련을 지도해준 요가 선생님은 나의 고민이 에고의 고민인 것을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여태껏 내가 겪었던 문제들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책의 모든 내용들은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그는 모든 문제와 불행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 말하며, 깨어남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자유와 기쁨’에 이르라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사업을 하며 왜 그런 감정들을 느껴왔는지를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에고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상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한다. 언제나 숨겨진 안건을 가지고 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고, 불충분함과 결핍감이 있으며, 어떻게든 그것을 채워야만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지만, 어쩌다 성공해도 그 만족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것’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에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고 고뇌한다. (...)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은 에고가 지배했던 감정이었을까. 어려서부터의 꿈을 이뤘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 내가 만든 브랜드에서 나를 잃어갔던 이유, 폐업을 하고 싶었지만 폐업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이유가 모두 에고였다는 것을 알았다. 톨레는 책에서 반복적으로 불충분함, 불완전함, 불만족 등이 에고였다고 말하며, 에고의 요구에 의해 채워진 만족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에고는 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내가 소유하는 것을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내가 많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랬다. 물건, 경력, 재산 등 많이 소유할수록 나라는 존재가 더 많이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더 많은 인터뷰를 할수록, 매출이 더 많을수록, 심지어 회사의 연차가 쌓일수록 내 존재가 더 커진다고 생각해왔더랬다.


에고가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기존적인 마음 구조들 중 하나가 동일화이다. ‘동일화 identification’라는 단어는 ‘같다’는 의미의 라틴어 ‘이뎀 idem’과 ‘만들다’는 뜻의 ‘파케레 facere’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내가 어떤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나는 그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 된다. 무엇과 같게 만드는가? 바로 ‘나’와 같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게 나의 자아의식을 부여하고, 따라서 그것은 나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내가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그 어떤 것이든 나는 그것과 동일시함을 통해 나와 ‘같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동일화하고 있는 대상은 어떤 물건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고, 통장의 돈 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있는 꿈일 수도 있다. 그것을 이루고 나면, 그것이 나를 설명하는 정체성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냥 그것이 나 그 자체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나의 경우, 도트윈이 동일화된 나였고 그랬기에 도트윈이 그 자체로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나는 나의 소유(라고 여겼던) 도트윈을 나의 존재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나에게 도트윈은 에고의 또 다른 형태였더라. 톨레의 말처럼 소유가 주는 만족의 깊이는 얕고 수명이 짧았다. 내면에는 뿌리 깊은 불만족과 불완전한 느낌,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숨어있었다. 꿈을 이뤘음에도 나는 오히려 그 안에서 나를 잃어가고 있었더라. 되돌아보면, 내가 바랬던 성공이 뭐였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분명 내가 원했던 것은 모두 이뤘는데, 만족은 짧았고 익숙해졌다. 더 큰 만족을 위해 더 추구해야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그만두자니, 내가 이뤄온 것들이 아깝고 나를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업을 해도, 폐업을 해도 똑같이 나를 잃을 것 같았던 그 기분은 에고의 장난이었을까. 개인사업을 하며, 브랜드를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며, 그것이 나를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면, 혹은 그것에서 나를 잃고 있다는 느낌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에고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톨레는 에고에서 벗어나 현재에 존재하라고 말한다.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때, 나의 관심이 충분히 ‘지금’ 속에 있을 때, 그 현존이 내가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와 그 일을 변화시킨다고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돈이든 명성이든 승리이든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일의 실현 그 자체가 목적일 때,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기쁨과 활력을 느낄 때, 내가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삶을 요구받으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목표를 세우고,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현재를 살아가라고 한다. 나의 대부분의 삶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그 과정 속에 있었다.


행위에 시간을 초월한 ‘순수한 있음’의 깊이가 스며들 때, 그것이 바로 성공입니다. ‘순수한 있음’이 행위 속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는 한,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있지 않는 한, 당신은 무엇을 하든 그 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을 것입니다.


나는 일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본 적이 있다. 소위 ‘내 것’을 하기 위해 창업을 한다고 한다. 내 것을 하기 위해 만든 나의 회사 속에서 스스로를 잃고, 폐업을 하더라도 나를 잃을 것 같은 그 혼란 속에서 이 책이 나에게로 왔다. 책 한 권이 나의 인생을 바꿔줬다라기 보다는, 일련의 과정이 나를 변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폐업을 고민할 때 가깝게 지내는 형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그를 따라갔던 요가 수련, 요가원 선생님의 선물까지. 이제 나는 나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발견하고 진정한 나를 찾은 듯하다. 어떤가. 당신을 괴롭히던 정체를 발견했는가. 아니면 머리가 더 복잡해졌는가. 어느 쪽이든 이 글이 당신에게 조금의 힌트를 줄 수 있었다면 다행이다. 당신에게도 이 글이 하나의 시작점이 되어, 당신을 괴롭히는 정체가 무엇인지를 찾아나가기를 바란다. 그 답이 에고의 발견이 아니라도 괜찮다. 무엇을 발견하든 당신이 창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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