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을 준비하던 우리의 보금자리, 디웰하우스 이야기
도트윈(Dotween)은 점자 메시지를 새긴 디자인 소품을 판매하여 시각장애인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려는 브랜드이다.
디웰 하우스의 입주민이자 도트윈의 공동창업자인 셋은 디웰 하우스로의 입주가 도트윈의 발전과 더불어 개인적인 측면에서 사회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2016. 05. | 루트임팩트 AR interview. 도트윈
2015년 3월, 나와 동생은 ‘진심을 전하는 브랜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도트윈’이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런칭한다. 브랜드를 창업하게 된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나는 ‘도트윈’의 창업을 함께 했던, 나와 동생이 함께 살았던 어떤 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16명의 이들이 함께 살았던 집에 대해. 2015년 1월, 스물두 살이 된 나와 동생은 마침 2년의 계약이 끝난 집에서 나와 다른 거처를 알아봐야 했다. 그 당시 나는 개인적인 일로 약 한 달간을 런던에 머물러야 했던 터라, 다음 거처가 어디가 되면 좋을지 조금은 빠르게 결정해야 했다. 런던으로 출발하기 전, 동생과 함께 거처를 알아보던 중 나와 동생은 특별한 집을 알게 된다.
우리가 알게 된 집은 ‘디웰하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쉐어하우스라고 했다. 그곳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사회 문제에 깊이 공감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을 위한 집’이라는 설명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와 동생은 그 집을 지은 루트임팩트라는 단체와 짧은 인연이 있었더랬다. 그들이 “디웰하우스에서 입주민을 찾고 있다”라는 이메일을 보내온 것은 과거의 인연으로 남겨져있던 우리의 이메일 주소 때문일 것이다. 그때서야 작년에 했던 인터뷰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성수동에 쉐어하우스를 지으려고 하는데, 당신들이라면 이곳에 살고 싶은지에 대한 사전 인터뷰 같은 것이었다. 신림동에 살았던 스물한 살의 우리에게 성수동은 꽤나 먼 동네였고, 굳이 모르는 이들과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았기에 분명 그런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와 동생은 그 이메일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잘 정리된 그들의 웹사이트에는 선해 보이는 젊은 남녀가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우리를 반겼다. 웹사이트에서 풍기는 그들의 선한 이미지는 우리가 인터뷰할 때 상상했던 공유 주거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중고등학교 오랜 기간의 기숙사 생활로 인해 공동생활에 있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와 동생을 설득할 정도였다. 그 당시 거주하고 있는 16명의 입주민에 대한 정보도 볼 수 있었는데, 웹사이트에 설명된 그들의 직업들은 흥미로웠다. 사회적 기업가, 소셜 벤처 및 비영리 활동가, 과학자, 디자이너, 개발자, 공익 프로젝트 운영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이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그들을 보며 왠지 모를 소속감과 안정감을 기대하게 되었다. 저들이라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나와 동생의 꿈을 진지하게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나와 동생은 ‘디웰하우스’에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공동생활이라면 그 어떤 것도 싫다던 우리는 선해 보이는 젊은 남녀의 사람 좋은 웃음에 가볍게 마음을 바꿨다.
그곳은 원한다고 누구나 입주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이 사실조차도 특별했다. 런던에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는 시간이 나는 대로 디웰하우스의 입주신청 자기소개서를 적었다. 고등 시절부터 꿈꿔왔던 사회를 위한 디자인, 그렇게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된 이유, 그리고 디자인을 통해 바꾸고자 하는 사회에 대해 담아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런던을 간 이유도 시각장애아동과 비시각장애아동을 위한 놀이 프로그램의 개발을 위한 인사이트 트립의 목적이었다. 타지에서 공을 드린 서류를 이메일로 제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나와 동생의 면접을 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이 집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서류와 면접을 통과해야만 한다.) 1월 말까지 런던에 머물 예정이었던 나는, 2월 초 동생과 함께 인터뷰 날짜를 잡았고, 여행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그들과의 인터뷰를 준비했다.
런던에서 돌아온 후, 금세 약속한 인터뷰 날이 왔다. 2월 초 어느 날, 저녁 7시경 예정되어있던 인터뷰 시간에 맞춰, 우리는 사전에 안내받은 주소로 찾아갔다. 지도에 검색한 디웰하우스는 서울숲에서 걸어 나오면 마주하는 첫 번째 골목에 위치해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지하철역인 뚝섬역에서 내려, 걸어서 그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하철역 ‘뚝섬역’을 가본 이들은 알겠지만, 어두운 겨울 저녁에 맞이하는 그곳 역사의 인상이 사실 그리 좋지만은 않다. 세기말 느낌의 초록빛이 감도는 역사의 분위기는 나와 동생을 압도했고, 역에서 내려 디웰하우스를 찾아가는 길은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음침했다. 당시 신림역 5분 거리의 고층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던 우리에게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주택가는 조금 무서울 만했다. 2020년 지금이야 그 부근이 매우 활발해져, 저녁 7시가 되어도 수많은 사람들과 불이 켜진 가게들을 마주할 수 있지만, 2015년 그 당시 그곳은 저녁이 되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걸어야 하는 인적이 드문 주택가였다. 이런 곳에 집이 위치해 있다니, 조금 무서울 것 같은데?라는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을 즈음, 멀리서 보이는 ‘D-WELL’이라 적힌 간판이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곳의 따뜻한 조명이 흘러나와 우리를 반겼고, 친절한 어떤 이의 안내를 받아 내려간 건물의 지하 아래층 공간에는 우리를 인터뷰할 두 명의 면접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끝낸 후, 우리는 그들의 질문에 답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친절했고, 인터뷰는 면접이라기보다는 대화와 같은 느낌이었다. 유난히 호의적인 면접관 그렇지만은 않아 보이는 면접관 사이에서 우리는 이 면접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던 면접관이 앞으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 질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우리의 두루뭉술한 비전이나 포부가 아닌, 실질적인 계획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와 동생은 여태 해왔던 생각, 활동, 고민 등을 바탕으로 ‘시각장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개선을 목표로 하는 브랜드를 만들고자 한다’고 답했다. 그것은 온전히 우리가 과거에 해왔던 일들에 기반해서 자연스럽게 나왔던 대답이었고, 사전에 결정된 것은 딱히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질문이 나와 동생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게 해 준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의 생각들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제삼자의 질문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함께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었음을 확인한다. 인터뷰를 끝마치고 나올 때까지, 호의적인 면접관은 유난히 호의적여보였고, 그렇지만은 않아 보이는 면접관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디웰하우스를 나서서 다시 뚝섬역으로 가는 길에도 우리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주택가의 적막함에, 이곳에 살아도 괜찮은 것인지를 고민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디웰하우스에 대한 이야기보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인터뷰 중에 얘기한 것처럼, 같이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게 맞는지 서로 다시금 질문을 했고, 우리는 서로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디웰하우스에서는 우리가 디웰하우스의 입주민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유능한 다른 지원자들을 대신하여, 나와 동생에게 그곳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아직까지도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디웰하우스에 살게 됨으로써 우리가 늘 고민만 하고 있던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나와 동생은 진정으로 원하는 일에 도전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다고 생각한 동시에, 왠지 그렇지 않아 보였던 그 면접관에게 우리를 신규 입주민으로 뽑은 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곳에 산다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많이 행동하게 할지, 또 얼마나 많은 기회들이 주어질지, 또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이 힘들어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진정으로 바랬던 다음 거처를 마련했다는 것에 크게 안도했고 기대했다.
3월이 가까워지고, 우리는 디웰하우스로 입주를 마쳤다. 디웰하우스의 1층은 입주민과 멤버십 멤버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디웰 살롱’이라는 공간이 있었고, 2층과 3층이 우리가 살게 된 ‘디웰하우스’, 즉 16명의 입주민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각 층은 두 개의 거실로 나뉘어있었고, 하나의 거실에는 세 개의 방이 있었다. 디웰하우스에서는 나뉜 거실을 ‘통’이라고 불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불린 네 개의 통 중에서 우리는 여름통의 2인실에 입주하게 된다. 디웰하우스는 쉐어하우스라는 수식어보다 커뮤니티하우스라는 수식어를 쓰곤 했는데, 그만큼 그곳은 입주민들 간의 커뮤니티를 강조했더랬다. 한 달에 한 번씩 입주민끼리의 반상회가 열렸고, 매달 16일에는 각 통별로 돌아가면서 아침을 준비하는 ‘디웰데이’라는 날도 있었다. 매주 일요일 아침에는 다 같이 모여 각자 여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를 이야기해보는 ‘SMCM’이라는 모임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모임들이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에는 확실히 기능을 한 듯하다. 디웰을 졸업한 후 나는 커뮤니티란 실제로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디웰이라는 커뮤니티에, 또 디웰을 중심으로 한 성수동의 커뮤니티에 일원이 되고 있었다.
디웰하우스에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체인지 메이커라고 정의 내린) 이들이 함께 살았다. 그들은 모두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간 선구자들이었다. 겨울통에 살았던 형은 비영리단체의 사무국장에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 상의할 수 있었다. 가을통에 살고 있던 누나는 대학에서 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도트윈의 패키지와 디자인 구성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듣곤 했다. 우리와 함께 입주한 누나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창업했고, 내가 폐업을 하는 순간까지도 창업이라는 어려운 여정을 함께 했다. 디자이너로 일하는 두 형과 함께 여름통에 살 때는 ‘summer boys’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도를 한적도 있었다. (오래가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여름통의 거실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기 좋을 만큼 넓었는데, 우리의 방을 나서면 유명 강연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체인지 메이커들의 진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그들과 나눈 대화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가르침을 줬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커뮤니티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아차린 듯하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끼리의 유대가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 또 영감을 주며 함께 성장했다.
총 3년에 가까운 시간을 ‘디웰하우스’에 살며, 성수동과 그 일대는 나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부산에서 상경해 대학생활을 했던 나와 동생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어준 곳이었다. 우리는 디웰하우스에서 또 다른 가족을, 동료를 만났다. 하우스메이트로 만나, 우리의 브랜드를 함께 운영하는 공동창업자가 된 이도 있었다. 함께 살았던 이들은 그렇게 우리의 인생 파트너가 되기도 하고, 사업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특별한 컨셉을 가졌던 디웰하우스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나와 동생이 하는 일들도 디웰과 함께 소개가 되곤 했다. 이 또한 우리가 디웰하우스에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선구자들과 함께 살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그 자체로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나와 동생의 창업에 초석이 되어준 디웰하우스가 늘 우리에게 힘이 되어줬던 것만은 아니다. 막내로서 커뮤니티 하우스에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잘 보이고 싶은, 또 우리가 존경하는 이들과 삶을 공유하는 것은 왠지 모를 부담감으로 나를 움추러들게 하곤 했다. 가장 편하게 지내야 하는 집인데도 나는 함께 사는 이들의 눈치를 볼 때도 있었고,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그 마음이 스스로를 괴롭힐 때도 있었다. 간혹 주변에서 전해오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길을 지나가며 나에게 인사하는 누군가가 속으로는 나를 안 좋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할 때도 있었다.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한동안은 방 안에서 나오지 않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도 집으로 돌아왔을 때만큼은 그저 한 명의 사람인지라, 우리는 서로 부딪히기도 했고, 해를 끼치기도 했고, 서로 실망할 때도 있었다. 주변의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어른스럽지는 못했던 나는, 점점 혼자만의 생각에 고립되어 마음의 병을 키우곤 했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가족을 떠나듯, 나와 동생은 디웰하우스와 3년의 시간을 함께하고 그곳을 졸업했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좋은 기회들이 조금씩 당연해지고, 좋았던 사람들과 기회들이 어느새 나에게 부담으로 다가와 스스로를 가두고 괴롭혔다. 그즈음, 나는 그곳을 떠나야 했음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어린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이었던 듯하다.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뭐라도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상처는 시간으로 치유되곤 한다. 이제는 그 시절 두려움에 떨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해줄 수 있을 만큼은 나도 꽤나 의연해진 듯하다.
내가 동생과 함께 ‘도트윈’이라는 브랜드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품었던 디웰하우스의 덕이 컸다. 루트임팩트라는 단체와의 사전 인터뷰, 그들이 보낸 이메일,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입주 면접, 함께 살았던 이들에게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들, 그리고 도트윈을 런칭하고 또 함께 성장시켜줬던 모든 순간들이 디웰하우스였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디웰하우스에서 함께 살았던 14명의 입주민,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커뮤니티 매니저님들, 디웰 살롱에서 했던 다양한 행사들을 통해 맺어진 인연들은 도트윈이 런칭하는데에, 또 성장하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줬던 이들이었다. 디웰하우스와 그로 인한 인연들과의 시간은 언제나 나에게 감사했던 시간으로 남아있다. 2015년 1월, 그 집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와 동생의 삶은 꽤나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도트윈’의 시작은 16명이 공유하는 집에서, 나와 동생에게 허락된 한 칸의 방에서 시작되었다. 방문을 나서면 나와 동생을 도와줄 사람과 공간이 우리를 감쌌고, 우리가 도전하는 데 있어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줬다. 모든 가족들이 그렇듯, 서로 부딪히고, 실망하고, 상처를 입을 때도 있었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그때의 사람들과 함께 모일 때면 그것조차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그저 그때를 그리워하곤 한다. 우리는 작은 방 한 칸을 나와서 우리의 작업실을 만들고 우리의 브랜드를 만든다. 2015년 3월 마지막 주, 도트윈은 디웰하우스의 1층 디웰살롱에서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세상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