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싶어도 뭔가 해야 한다.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기획자가 이런 걸까요?
제가 기획자에 맞지 않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이 회사가 이상한 걸까요?
5년 차로 접어드는 후배의 한숨 섞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고민을 결국 맞이하게 했구나, 기획자에게 이 고민은 꼭 한 번은 오는 건가 보구나.
당연한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저런 고민을 마주하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동안 일을 해오면서 서비스 기획자로 불릴 때도, 프로덕트 매니저로, 프로덕트 오너로 불릴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해야 하는 업무 범위와 역할 또한 조직마다 상이했다. 불리는 명칭은 매번 달랐지만 스스로는 계속 기획자로서 일해왔다.
그 과정에서 문득문득 드는 이 고질적은 생각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인 걸까
나 또한 선배들에게, 동료들에게 '이런저런 걸 하고 있는 내가 뭐 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한숨과 막막함, 혼란함을 풀어놨었다. 그러면 다 같이 술 한 잔과 함께 '우리가 기획자냐, 그냥 직장인이지' 웃고는 했다. 그렇게 웃고 나면 선배들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 싶은 게 그게 기획자야.'
서비스 기획자들이 자조적으로 지칭하는 표현 중에 '잡부'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는 그냥 잡부지, 잡부야
기획자들의 역할은 그때그때 유연하게 변한다. 본업인 기획을 하면서 보고서를 쓰기도, 리서치를 하기도, 성과를 측정하기도, 프로덕트 평가를 쓰기도, 일정 관리를 하기도, 빠른 대응을 위해 운영을 할 때도 있다.
프로덕트의 잡부, 그게 우리 기획자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명쾌하게 내가 해야 할 일이 보였다.
프로덕트를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담당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가 빼먹는 일도 자꾸만 생긴다.
원래 내가 했어야 하는 일, 할 사람이 없으니 챙겨야 하는 일, 놓친 일, 빼먹은 일, 몰랐던 일…
매 프로젝트에서 그런 일이 몇 차례 지나가고 나면 ‘나는 뭐까지 해야 하는 사람인가’하는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열심히 해도 부족한 것이 더 부각되는 것 같고, 내 노력을 남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왜 이렇게 일을 해도 부족한 게 많은지, 정책을 물어보는 작업자의 질문에는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리고 내가 내 기획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밀려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곤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기획자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왜 계속 기획자로 일하고 있을까.
내가 몸 담았던 그 어떤 조직에서도 프로덕트를 만들 때, 필요한 역할의 담당자가 모두 완벽히 마련되었던 적이 없다. 프로덕트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어쩔 때는 콘텐츠 담당자가, 운영 담당자가, 제휴 담당자가, 사업 담당자가 또 어쩔 때는 전략 담당자가 부재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그 조직에 기획자가 있다면(그리고 개발자, 디자이너가 함께 있다면!) 프로덕트는 나와야 하고, 나오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비어있는 역할들은 누군가 메꿔야 한다.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그 부분을 메워 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프로덕트의 퀄리티를 책임지는 고민을 좀 더 맡아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들과 의견을 나눌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그들의 작업에 몰입할 때, 기획자가 프로덕트 전체 프로세스에서 비어있는 부분을 메꾸는 것이 주로 겪는 일인 것 같다.
프로덕트의 생애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 기획자다.
그래서 서비스 기획자는 그 프로덕트를 어떻게든 돌아가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되고, 그렇게 프로덕트의 잡부가 된다.
대부분의 서비스 기획자들의 업무 경험은 '기획'에만, '매니징'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나 또한, 전략을 짜야할 때도 콘텐츠를 만들어야 할 때도 데이터를 만들어야 할 때도 서비스를 운영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다시 나를 기획자로서 성장시켜 주었다.
기획자가 해야 하는 일인가 고민하던 그 경험들은 이후 해당 직무의 전문가를 만났을 때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획해야 그들이 일하기 더 용이한지 판단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기획자가 협업자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기획에 녹여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역량이다.
그래서 나는 늘 이야기한다. 프로덕트를 만들고 성공시키기 위해 하는 모든 일 중에 기획에 불필요한 일은 없다고.
나는 프로덕트를 담당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무엇이든 해서 프로덕트를 성공시키고 운영되게 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 결과가 나왔을 때에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와 성과를 받는 사람도 기획자인 나이다.
나는 책임감이 기획자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감을 중시 여기고 그를 통해 개인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기획자, Product Manager라는 직무는 지속하기 괴로울 것이다.
프로덕트를 사용자들에 대한 책임감, 함께하는 프로젝트 구성원들의 노력을 헛되이 쓰지 말자는 책임감이 기획자가 프로덕트를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되는 동력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성취는 분명, 내가 기획자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을 만들어 줄 것이다.
대부분의 기획자들이 괴로워하는 부분의 근간도 책임감인 경우가 많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설계하지 못했을까, 개발자의 고충을 왜 몰랐을까, 커뮤니케이션을 왜 그렇게 했을까, 사용자가 이렇게 사용할 것을 왜 예상하지 못했나...
모두 결과물과 그 과정에 대한 책임감으로 발생하는 고민과 자책들이다.
내가 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아닌지.
이런 고민을 하는 지인들은 '내가 기획자로서 부족하지 않은가' 늘 고민한다.
(물론 기획자인 나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도 동일한 고민을 하게 되지만, 이는 좀 결이 다른 '기획자의 때' 혹은 '직장인의 때'이므로 다른 글에서 풀어나가고자 한다.)
나는 본인의 결과물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면, 정신 차려보니 뭐든 하고 있다면, 좋은 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후배에게 나는 딱 두 가지를 말해주었다.
1) 너에게 기획 역량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하는 모든 것들은 기획자로서 쌓아두면 좋은 경험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차근히 진행해 보라. 지금의 경험만으로 '나는 기획자에 맞지 않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 이 회사가 이상하지 않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어떤 직무로 누구와 일을 하든 이상한 사람 혹은 어려운 상황은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그를 흘려 넘기고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 협업 프로세스를 정리하며 커뮤니케이션해 나가는 것을 훈련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다.
나는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이 자리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
나 또한,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획자로서 나는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각자 겪은 경험에 따라 모두 다를 것이다.
다만 공통적인 것은, 기획자에게는 보통 오너십이 많이 요구된다. A부터 Z까지 프로덕트의 모든 것을 잘 책임져주길 요구한다.
프로덕트에 오너십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프로덕트를 위해 계속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획자로서 프로덕트를 위해 아쉬움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을 갖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