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션 가는 길. 요새 계속 펜션 가는 길 생각이 난다. 렌터카를 빌려 가평으로 가다 보면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른다. 대충 길가에다 차를 주차하고 마트로 들어가면 일단 술부터 산다. 나는 맥주를 좋아하지 않기에 소주로 산다. 같이 간 친구들이랑 장난치다 보면 소주를 열 병은 산다. 지나가다 양주도 한 병 사본다. 무슨 위스키였더라? 고기도 산다. 다 사서 나오면 영수증이 정말 길다. 누가 이렇게 많이 샀어, 누가 이걸 다 먹을 수 있겠어, 하고 웃으면서 뒷자리에 탄다. 면허가 없는 나는 운전할 수 없지만, 이제 갓 면허를 딴 친구들은 앞다퉈 운전을 하려고 한다.
다시 차를 탑승한 뒤의 기억은 없다. 그저 펜션 가는 길. 하나로마트 주차장에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간판, 영수증에 빼곡히 적힌 숫자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보이던 햇빛. 그러고 기억을 건너뛰면 나는 뒷자리 중간에 앉아 있는 듯하다. 왜 중간자리에 있지, 나의 양옆에는 누가 있지? 운전하고 있는 친구와 앞 좌석에 앉은 친구, 그들은 각자 순서대로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를 부대끼고 앞에 보이는 길에는 차 한 대와 나무 몇 그루.
이게 실제로 있었던 기억인가? 분명히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 같은데. 이제 영화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나는 영화 대신 릴스를 본다. 그래도 한창 대학교 다닐 때 영화를 그렇게 봐서인지 릴스에는 영화들이 뜬다. 영화는 볼 순 없지만 영화 릴스는 여전히 잘 본다. 그저께는 봉준호 감독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라는 미야케 쇼 감독의 작품이 자신의 최애 중 하나라고 했던가. 하여튼 바쁘게 살던 요즘 영화 제목이 왠지 마음에 들어 삼 달러를 내고 구매해서 보았다. 영화가 시작되며 주인공은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던가. 구월이 되어도 여름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펜션 가는 길. 영화 속 청춘들은 기차를 타고 펜션에 간다. 마트에서 나오는 길. 비가 조금씩 오는 편의점 앞, 대충 과자와 술을 사들고 나오며 우산은 하나밖에 없어 셋이서 나눠 쓰는. 조명은 흐리고 밤은 밝다. 펜션 가는 길, 그 길은 설렌다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그저 당연한 것. 생각해 보니 내가 펜션 가는 길, 그날 전날 술을 너무 먹어서 술 또 먹어야 하나 라는 걱정만 앞섰던 기억, 그래도 그냥 별생각 없이 창밖만 바라보며 날씨 참 좋구나. 영화 때문인지 또 펜션 가는 길 생각이 났다. 그때가 스무 살이었던가. 미국 나이로 하면 열여덟 살이었던 나이,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에 술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미국에는 펜션이 없다. 사실 펜션이 무엇인지 정확히도 잘 모르겠다. 그냥 글램핑장이 펜션인가? 미국에는 글램핑장도 없는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내가 가는 길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담배 피우러 갈 때 아파트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돌아 뒷골목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두 번째는 아파트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돌아 출근하러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이다. 때로는 첫 번째 길을 갔다가 두 번째 길도 갈 때도 있다. 사실 이제는 담배 피우는 일도 지겨워서 그냥 나가서 담뱃불만 켜고 담배가 바람에 맞으면서 서서히 꺼져가는 것만 지켜보다가 온다. 때로는 담배가 꺼진 것도 모른 채 한 모금 들이키면 밋밋한 숯향 같은 것이 나고 나는 건강을 생각하기에 한번 꺼진 담배는 다시 태우지 않는다.
어젯밤에도 담배를 피우러 가는 길, 그러니까 첫 번째 길을 따라서 왼쪽으로 돌아 뒷골목으로 갔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없었다. 내가 사는 곳은 밤에는 꽤나 위험해서, 아니 사실 마약중독자들이라 위험하지는 않은데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꽤나 위험해 보여서, 아무튼 뒷골목 쪽으로 가면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있는데, 오늘은 그 넓은 곳에 빈 벤치들만 있었고 나만 있었다. 천천히 뒷골목을 휘저으며 걸어 다니다가 문득 왼쪽을 봤는데 큰 창문에 나의 모습이 비친 것이 보였다. 불투명한 거울 같은 창문에 내 얼굴을 바라보니 문득 내가 변했나? 나는 어떻게 변했는지, 아니 생긴 것의 변화는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생긴 게 달라졌나? 앞머리를 들춰서 왠지 탈모가 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다가, 스무 살, 아니 만 열여덟 살 때에도 탈모가 걱정되어서 한의원에 간 기억, 한의사가 나를 비웃으면서 네가 탈모면 나는 이미 끝났어, 나는 부끄러웠지만 왠지 기분 좋아서 걸어 나오면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었던 기억. 그런데 지금 거울을 보고 있자니 진짜 탈모인 거 같은데 별 걱정은 안 되는 느낌, 그래, 나는 변했나? 담배도 물었다 빼보고, 내가 담배를 피네? 그 사이 불이 꺼졌지만 담배는 내 손에 있었고 나는 왜인지 모르게 펜션 가는 길 생각이 났다.
하나로마트는 아직 그곳에 있을까. 펜션 가는 길. 뒷좌석 중간자리에 앉아서 앞을 보면 창문에 나는 없었다. 길과 나무 친구 햇빛이 있었고 나는 분명히 없었다. 나의 기억 속에도 내 모습은 없고 그저 세상만 있었던 펜션 가는 길, 창문에 내 모습이 비치지 않았던 것인지 내가 잊어버린 것인지, 그래 나는 유령이었을 수도.
어젯밤 창문에 비친 나의 모습은 너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