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부여 시작인 듯
회색 인간이라는 소설을 접한 것이 아마 반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때는 아마 내 소설인 '혼'을 POD 사이트를 통해 자가 출판한 후였을 것이다. 내 이름이 박힌 책. 자랑스럽고 뿌듯했지만, 수많은 투고 끝에 낙방하고 만들어서 조금은 씁쓸했던 기억도 난다.
그 시기에 접한 회색 인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든 이야기는 최소한의 구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정보와 배경, 복선 등을 주어야만 하지 않을까. 상상력의 크기라는 것이, 작가라서 크고 독자라서 작다고 예단할 수는 없지만, 상상력의 극단적인 약점을 고려하자면, 작가 멋대로 상상한 이야기를 독자가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의 분량은 중요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단편을 별로 좋아하지도, 잘 읽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초단편이라니. 어불성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오로지 떠오르는 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오로지 재미를 위해 쓴 회색 인간은 생경한 감동을 줬다. 작가도 인정한 대로 아주 일부, 문장 구성이 어색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평소라면 질색했을 그런 부분마저 그냥 무시할 정도로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그런 김동식 작가의 새 단편집, 청부살인 협동조합은 어떤 재미를 줄지 상당히 기대했다.
'너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분명 긍정의 감탄이다. 총 20개의 단편이 어느 하나 쉬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애초에 ISTJ인지라, 이런 상상력이 매우 부족한 내 기준에서 그런 것일지 모르나, 김동식 작가의 상상력은 마치 꽉 짜인 벽의 틈새에 날카로운 끌을 집어넣는 것처럼 기묘한 방향으로 뛰쳐나간다.
'1분만 조종할 수 있다면'에서는 저주받은 장치로 타인과 1분간 영혼을 바꾸는 이야기로, 재벌인 두석규와 철천지한인 김남우, 그리고 재벌의 재산을 노린 괴한이 단 두 번의 기회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 이야기인데, 반전에 반전과 반전을 더해 매우 흥미진진했다.
'무서운 침묵'에서는 5만 원권이 마르지 않지만, 한 장을 꺼낼 때마다 전 세계에서 무작위 1명이 죽고, 다시 넣을 때는 죽었어야 할 1명이 사는 지갑이 나온다. 처음과 달리 한 동안 지갑을 죄책감 없이 쓰던 주인공이, 어느 날 한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이를 재벌 회장에게 전달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독백으로 전한다. 하지만 회장의 질문에 주인공은 무서운 침묵으로 답한다. '나와의 면담에 든 8억 원은 어디서 구했나.'
'돈을 버는 사람은 누구인가'에서는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속칭 '리딩 방'을 비꼰다. 어떤 남자가 로또의 당첨을 소원으로 빈다. 미상의 존재를 만나 그 소원은 이뤄진다. 매년 1회 로또에 강제 당첨되는 것. 다만, 매년 말일, 15억 원을 바치지 못하면 죽는 것이 조건. 평균 당첨금이 16억 4천만 원이라는 말에 수락하지만, 불행히도 첫 당첨에서 15명이 당첨되는 바람에 11억 원의 당첨금만 받은 남자. 살기 위해 결국 코인 투자를 시작하고 리딩 방에 들어갔지만, 속아서 손해를 보고 만다. '투자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리딩 방장의 말에 분노했던 남자는 죽음의 위기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로또 리딩 방'. 실제 로또 당첨자이자 매년 당첨되는 남자가 운영하는 리딩 방은 대박이 나고, 남자도 이제 같은 말을 반복한다. '투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죠.'
위 3편 외에도 정말 기발한 상상력이 넘쳐난다.
서두에 말했지만, 회색 인간을 읽은 지 조금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희미하긴 하다. 다만, 그때 읽었던 느낌과 이번 청부살인 협동조합을 읽은 느낌에서 뭔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일단 공통점은 위에 언급했듯, 놀라운 상상력과 군더더기 없이 간략하게 이야기를 이끌어서 끝내는 깔끔한 솜씨다. 단편마다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지?'라며 놀라면서도 지루할 틈 없이 읽어 내려가는 속도감이 경쾌하다.
앞선 소설과의 차이는, 작가의 말과 대치되는 부분이다. 작가는 스스로 오로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쓰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회색 인간에서 보았던 거의 '맹목적인' 상상력의 발현은 아니었다는 느낌이다. 대부분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내가 생각할 때, '자본주의'의 단면이었다. 조금 식상한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난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 혹은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어둠과 악함, 그리고 그 후에 따라오는 후회와 번민을 주로 이야기했다.
게다가 반전 요소를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차용했는데,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반전들이 있었다.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거면'에서의 타임루프라던지 '낚시터로 찾아온 사내'에서 쌍둥이, '언젠가 냉장고 문을 열 테지만'의 블랙 코미디스러운 반전은 자칫 식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나 '죽음의 방탈출', '벌레들의 긴급한 밤'도 설핏 끝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얹어, 리딩 방이나 악플, 유튜브 같은 사회현상을 접목시키는 부분들이 예전에는 없던 의미부여를 보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어느 정도 반전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이야기 흐름이나 그 소재, 사건의 원인이나 흐름 등이 정말 기발하고 놀라운 상상력에 기인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작가이며 대단한 작품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본 서평은 서평단 참여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증정받아 작성하였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적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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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셋방살이 중입니다. '작가의 서재' 방만 제 관할입니다. ㅠㅅ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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