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꽃 핀 데로. 오금을 뒤틀며.
산 자가 죽은 자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 따라 걸으려 하면 오금이 뒤틀리게 마련입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숨결을 맡으면 구역질이 날 뿐입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기억을 갖고 살려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1980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 역사의 과오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한 사람의, 한 집단의 실수라고 명명하기에는 그 사실이, 그 진실이 너무나 선명히 잔혹하고 무겁게 슬프기에 누군가의 치부恥部로 치부置簿한다고 해도 그 어떤 위로도, 위안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소년은 봅니다. 무명천 아래 누운, 유일하게 용서할 수 있는 소녀를 봅니다. 선명하지 않기를 바랐던, 죽은 자의 눈동자를 봅니다. 그리고 살아있음에도 죽은 소녀의 눈동자보다 더 흐릿한 노인의 눈동자를 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소년은 또 봅니다. 골목길 접어들 때, 자신이 들 수나 있을지, 살아있는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나 있을지 자신 없는 그 총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군인들에 의해, 쇠가 몸을 뚫어 나자빠지는, 그리고 이내 몸이 차가워지는 청년을 봅니다. 그리고 그 청년의 애인인지, 동생인지 모를 소녀가 차가워진 죽은 자의 발자국을 이끌다가 역시 같은 처지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둘을 되돌리려는 아저씨를 또 봅니다. 그 아저씨 역시 그 둘과 같아지는 것을 보고, 그들과 같아지지 않는 자신을 봅니다.
같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렇게나 어렵습니다. 공수부대가 집까지 총을 들고 들어와 백주대낮에 수백 발의 쇠붙이를 쏟아내는데 이 순진한 아저씨는 머리맡에 식칼을 두고 잠을 청합니다. 그 밤에 아저씨는 꿈을 꾸지 못 했을 겁니다.
지도부 대변인이 외신기자들의 셔터 앞에서 큰 소리로 패배를 자신하고 죽음을 맹약하고 있을 때, 소년은 승리를 기대하고 삶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에게는 두려움은 있을지언정 그 어떤 초연한 확신은 없었을 겁니다.
지하, 흔들리는 백열등 아래에서 그들이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품위는 단지 침묵이었습니다. 우리 군대가 총을 쏘았지만, 넋이 나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친구의 손을 잡아끌며 목청이 터져라 애국가를 부르던 소년은, 모든 일이 일어났지만 무슨 일도 없었던 그 새벽의 일들을 뇌리 속에서 정돈하느라, 혹은, 싸구려 모나미 볼펜으로 도저히 써 내려갈 수 없는 진실을 꾸역꾸역 삼켜내느라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남은 것은 사라져 버린 권한입니다. 이제 그 누구도 더 기억하라고 소년에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아무도 쏘지 않았던, 쏠 수 없었던 총을 나누어 가진 아이들이 이제 우리에게 더 기억하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마저도 잊어가고, 잃어갑니다.
소년은 여름을 넘지 못했습니다. 소년 대신 우리는 35번의 여름을 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잔혹합니다. 한 시인은 민주주의를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서툴게 써 내려간 이름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이름에 떠오르는 것이 살아오는 삶의 아픔, 되살아 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짧은 나날이었습니다. 단 10일의 노래였습니다. 단 10일의 슬픔이었습니다. 단 10일의 눈물이었습니다. 이제 35번의 여름을 넘어, 35번의 가을이 오면서 그 기억들은 낙엽처럼 흩날리고 땅 속으로 묻혀 더는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래전 일을 자꾸 들춰내면 상처가 덧나는 것 아니냐고. 이제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으면 그만 이야기하라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날은, 소년은, 무명포는, 방수 모포는, 지하실은, 흔들리는 백열등은, 모나미 볼펜은 상처가 아닙니다. 붉고 뜨거운 피를 흘렸지만 상처는 아닙니다. 그것은 발자국입니다. 산 자가 오금을 뒤틀며 따라 걸어야 하는 죽은 자의 선명한 발자국입니다.
소년은 아주 큰 짐을 지고 여름을 건너기 위해, 뜨거운 여름이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며 만물이 과실을 맺는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아갔습니다. 짐의 무게만큼 그 발자국도 깊이 파였습니다. 너무나 선명해서 우리 가슴에 멍이 들 정도로 또렷하게 남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여름을 소년은 건너지 못했고, 우리만 35번의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소년이 지고 있던 거대한 짐에서 조금씩, 조금씩, 식량을 빼내 먹으며 소년의 뒤를 따라 우리는 가을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짐이 가벼워져 점점 발자국은 흐릿해지고, 우리도 이제 갈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때,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걷다, 끝내 여름을 건너지 못한 소년을 기억합니다. 그 소년이 남긴 깊은 발자국을, 짐도 없이 따라 걷는 저는 아마 오금이 뒤틀려 비틀댈 겁니다.
하지만 걸어야 합니다. 오금이 뒤틀려도 그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이 여름을 건너 가을로 가는 길이기에. 그 발자국을 따라 캄캄한 데가 아닌, 밝은, 꽃 핀 데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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