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말로 해야하는 것
우리의 삶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의 어른이 즈려밟고 온 그 예전의 길들이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전쟁과 어려운 시기, 신분과 여성에 대한 편협하고 그릇된 시선. 그것들을 이 삼대三代는 이겨냈는가.
어찌보면, 모두 이겨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신 그들은 견뎌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이겨내었다. 승리라는 것이 싸워 쟁취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런 모든 고난과 역경에도 서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길고 긴 세월 속에 녹여내어 다시 어두운 밤길을 걷는 지연에게 환한 빛을 비쳤다. 그렇게 밝은 밤을 선사한 할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이야기.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도, 지연의 이야기는 가슴이 먹먹한 것을 보니 아직도 이겨내는 중인가보다.
이야기는 독립 이후 6.25 전쟁을 겪은 지연의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에게서 시작된다. 전쟁통, 거기에 여성에 대한 핍박과 차별, 강압이 일상이던 시절, 둘의 우정은 그 자손에게도 이어지고, 인연은 끈질기게도 지연에게까지 닿는다.
언니의 죽음과 이혼, 엄마와의 갈등으로 지친 지연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원가족을 피해 희령으로 이사한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추억으로 간직했던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고, 할머니를 통해 증조할머니의 기구하지만 따듯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지연은 새비 아재비와 새비 아주머니의 모습, 그리고 증조할머니와의 인연에서 뭔지 모를 따뜻함을 느끼고, 할머니와의 관계에서 조금은 마음이 회복됨을 느낀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한 것이 있었다. 마치 '82년생 김지영' 혹은 웹드라마 '며느라기'를 봤을 때 느낀 그런 불편함은 아니었다. 난 페미니즘은 아니지만, 82년생 김지영을 책으로 읽은 후 영화까지 보면서, 우리 어머니와 누나가 떠올라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었다. 며느라기를 보면서는 주변의 시집살이 이야기와 우리 집 상황을 빗대어 보면서 와이프와 꽤나 재밌게 웃기도 하고 욕을 하며 한탄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성차별이나 그릇된 성인식, 혹은 고정적인 선입관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역시도 범인인지라, 그런 사상들이 알게 모르게 일부 깃들어있기도하다. 그런고로, 소설에서 등장하는 고조할아버지나 증조부, 혹은 아버지나 이혼한 남편들이 보여지는 모습이 편파적이라거나 일부 남성들을 일반화하여 비판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즉, 멍청하고 우둔하며 어느 한 구석 제대로 쓸모가 없었으며 결국엔 피해만 끼치는 남성상에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은 그 시대에 살아가며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응당 '그러려니'가 가능한 모습이었으므로.
다만 내가 불편했던 것은, 그런 억압과 애상 속에 살아왔으면서도 결국은 그 딸에게 대물림하듯 이어지는 슬픈 삶의 모습이었다. 아니, 결국은 그렇게 이어지는 삶의 행태라기 보다는 어머니에서 어머니,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그 삶의 연속성 속에서 단절되어버린 어머니와 딸의 솔직한 대화의 부재였다.
증조모부터 조모, 엄마에 이르러서까지도 모두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심지어 지연 역시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어머니에게 혹은 딸에게 진심을 밝히지 못한다.
마지막에 가서야 조금은 갈등이 봉합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역시도 일부일 뿐, 완전한 화해와 이해로 들어서지 못했고, 그마저도 조모의 나이를 생각하면 결국 늦은 후회로 남을 것 같아 안타깝다.
전쟁의 시기를 거슬러, 대서사에 가까운 긴 이야기를 꽤나 흥미롭게 읽어내릴 수 있었다. 지연과 할머니의 모습은 돌아가신 친조모를 싫어하는 나마저도 흐뭇한 감정을 느낄 정도로 따뜻했다. 하지만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한 것은, 결국 모두의 마음을 아는 것이 등장인물이 아닌 소설 외의 독자인 나 뿐이라는 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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